늘 오늘만 같기를.
오늘처럼 조금만 성폭행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앞으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지금의 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과거에서 어서 풀려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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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빨래할 생각도 들었고
방을 치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
이런 저런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생각들이 든다는 게 참 기쁘다.
그리고 작은 소망이 생겼다.
내가 이따금 떠올리곤 하는 작은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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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잘 드는 나만의 방이 하나 있는데,
연구실이나 교수실쯤 되는 것 같다.
거기에는 온갖 성폭행과 근친상간에 대한 연구 자료들이
모여 있고
나는 거기서 나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돕는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내 연구실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것도 속이지 않고
나는 완전히 나로서 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정말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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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오늘 하루는 가뿐하게 보낸 것 같다.
오늘만 같기를.
오늘처럼 가족들과 거실에 앉아서
작은 농담에도 웃을 수 있는.
길을 걷는 동안
내가 본 풍경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를.
지나간 것들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건
오로지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내 인생이 비참하다는 생각 뿐인 것은
너무나 슬프다.
오늘 하루가 다 기억날 수 있기를.
무엇을 먹었고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옆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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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친구들은 무얼 하면서 사는지
이따금 궁금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전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노트북은 언제 수리할 지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은 언제 뺄지
아이라이너는 언제 살지
MT에는 뭘 입고 갈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 지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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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머릿속엔 온통
내가 겪은 일들 생각 뿐이다.
딱 세 글자.
'성폭행'
하루 종일.
그게 너무너무 슬프다.
얼른 얼른
모든 것을 털어 내고
사소한 것들을 고민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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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는 소리에
'누구지?'
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문이 열리거나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리면
'어디로 도망가지?'
하는 생각부터 든다.
아니면 '어디에 숨지?' 라든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늦게 들킬까.'
'밖으로 도망가면 제일 먼저 어디로 들어갈까'
뭐 이런 생각들을
한 3초만에 시나리오를 짜는 것 같다.
일단 베란다 벽장 속에 숨고
그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가 내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다른 방을 찾아보는 사이에
우리집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베란다로 빠져나가서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
시내에 있는 파출소로 가기.
대충 뭐 이런 시나리오.
최악의 상황에는
어떻게 하면 그에게 들키기 전에
부엌에 있는 칼을 집어들 수 있을 지
동선을 짜본다.
정 안 되면
베란다 문을 잠그고
내 방문도 잠근다.
그리고 최대한 버틴다.
그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재빠르게 이런 생각을 한다, 아직은.
언젠가는 이런 생각 대신
'엄마가 왔나?'
'동생이 왔나?'
'할머니가 왔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사왔을까나'
라는 가벼운 기대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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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