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래간만에
스펙터클한 꿈을 꾸었다.
좋게 시작했다가
드럽게 끝나는 꿈이었다.
여러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빙하를 걷고 있었다.
무슨 설국열차 커브길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밑은 얼다 만 호수나 바다 같은 곳이었다.
저 곳을 걸어가야 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 겁에 질려 있었는데,
그 커브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맥없이 길이 주저앉았고
우리들은 모두 물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질겁을 해서
물에 빨려들어가지 않으려고
눈뭉치를 잡고 또 잡았지만
미끄러운 눈뭉치는 나를 지탱해주기는 커녕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다행히 꿈이어서 그런지
차갑거나 춥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내 몸은 자꾸 빠져들기만 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눈뭉치를 붙잡고
기어오르려 하고 있는데
그 때,
수영을 하던 한 남자가
발버둥치는 내가 웃기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나를 번쩍 들어서
땅 위로 밀어올려주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소지섭이었다.
하.
소지섭이라니.
땅 위로 올라온 이후에도
벌벌 떠는 나를 위해
소지섭은 계속 손을 잡고 있어주었다.
(드라마의 폐해)
나는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있었고
내 왼쪽 옆으로는 두 명이 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소지섭은 내 오른쪽에
벤치 옆에 쭈그려앉다시피 해서
내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드라마의 폐해)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던 나는
자리를 내서 소지섭더러 앉으라고 했고
소지섭은 거기에 낑겨 앉았다.
그 때 그는 빨간색 슈트를 입은 채였다.
(드라마의 폐해)
피곤했는지 소지섭은 내 어깨에 기대왔고
우리는 손을 잡은 채로 그렇게 기대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소지섭이
내 목에
하.
혀가 다 느껴지도록 키스를 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더 일어났던 것 같기는 한데
가물가물하다.
큰 트럭 같은 걸 탔는데
나는 조수석에 타고 소지섭은 뒷자리에 타서
누워서 자던 것도 같고.
아무튼 첫 번째 꿈은 끝이 났다.
두 번째 꿈은 거지같은 꿈이었다.
첫 번째 꿈을 꾸고 나서 일어나니
아침 열 시 쯤 되어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기가 싫어서
다시 누웠는데
갑자기 TV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엄마랑 동생이 안 나갔나, 싶었는데
밥을 먹으라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도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는 벌거벗은 채로 내 방에 들어왔다.
같이 살 때도 습관처럼 하던 짓이었다.
나는 그의 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꺾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실실거리면서
그의 성기를 내 얼굴에 비벼대면서
왜 그러냐고,
밥 먹으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소름이 끼쳐 버린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마구 뛰었다.
어느새 우리 집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아니라
내가 13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던
그 집, 그 동네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그의 차를 확인한 것이었다.
지하 1층에 대놓았는지
아니면 지하 2층에 대놓았는지.
지하 1층이라면
단지 나에게 그 짓을 하러 왔다는 것이고
이제 곧 갈 것이라는 것이었고,
지하 2층에 대놓았다면
아예 집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차는 지하 1층에 있었다.
나는 그가 이제 곧 갈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시 뛰어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숨을 만한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105동 뒤에 있던 정자로 줄달음을 쳤다.
꿈에서 그곳은 원래의 크기보다 한참 확대되어 나왔다.
거기에서 숨을 죽이던 나는
이제 곧 행사가 열린다는 소리에
장소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다른 곳을 물색하고 있는데
친구가 이 쪽으로 오면서 나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너 어디 가냐고.
너야말로 어디 가냐고 했더니
자신은 서울에 간다고 했다.
나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자던차림 그대로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고 나왔던 터라
선뜻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 친구를 바래다 주고
나는 PC 방에 들어갔다.
얼마쯤 컴퓨터를 하고 나서,
아버지가 이제 갔을 거라는 생각에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가서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로션도 바르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벨을 눌렀다.
문도 열어주지 않았는데
누가 문을 갑자기 훽 열더니
우리 집 카드키와 열쇠를 나에게 던져주었다.
'뭐지?'
하는 생각으로 드라이기를 사용하러 안방에 갔는데
안방 화장실에
아버지가 벗은 몸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질겁을 한 나는
그 길로 다시 밖으로 뛰쳐 나와서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언제 집었는지
내 손에는 우산 두 개가 들려 있었고
그 우산 두개로 땅을 짚어가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뛰기 위해 사력을 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꿈에서는 내가 원하는 만큼 속력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꿈에서 깼다.
.
.
그 시절 나의 습관 그대로가
꿈에 나타났다.
잊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집에서 뛰쳐나오자마자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선택해서 뛰어내려오던 것도,
잊지 않았다.
엘레베이터를 타면
계단을 이용해 먼저 내려간 아버지가
아래 층에서 엘레베이터를 잡아놓을 수도 있으니
계단을 이용해서 맨발로 뛰어내려가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바깥으로 나가면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눈에 띌까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곤 했던 것도.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아버지의 차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어디다 세워놨는지.
그래야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
확인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도망친 후에는 좀처럼 아파트 앞쪽이나
중앙쪽으로 가지 않고
105동 뒤에 있었던 정자 쪽으로 길목을 잡곤 했다.
그 곳은 뒷마당과 같아서
아파트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으로 갈 경우 아버지의 눈에 띄게 되기 때문에
그 쪽 길로 뛰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버스를 타러 가지도 않았다.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아파트 안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버지는 차가 있기 때문에
도로로 간다면 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안에 숨어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자나 놀이터, 지하주차장, 다른 동의 다른 층 모르는 사람의 집 앞,
같은 곳이 내가 숨던 곳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간 것 같으면
다시 조심스럽게 집에 들어갔던 것 까지도.
.
.
이래서
무의식은 무서운가 싶다.
뒷통수 맞았네.
하나도 안 잊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