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는 괜한 자격지심에 머리아파하고 있다.
지는건 죽어도 싫다.
미움받기도 싫다.
.. 하지만 내가봐도 난 예쁜녀석은 아니다.
2002년 8월의 어느날.
이상하게 민감한 날이었다.
술을 마신탓도 있었지만, 얼마후면 오빠가 그만둔다는 사실에 불안해서.
장난처럼 웃으면서 가지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두다 진심이었다.
결국 우린 싸웠고 한번도 화낸적 없던 오빠가 내손을 힘없이 놓고 돌아섰다.
깜깜한 주차장을 지나서 기숙사로 향하는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난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돌아서서 가버리면 다신 못볼지도 모른다고.
계단양옆을 장식하고 있던 할로겐등이 눈물에 뿌옇게 보이지 않을때쯤.
난 뒤돌아서 주차장을 향해 뛰어갔다.
길건너 가로등아래 희미하게 오빠가 보인다.
고개를 숙이고 발을 움직이며 서있던 오빠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영화를 많이 본 탓이리라.
난 울면서 달려가 그렇게 두시간을 안겨서 울었다.
오빤 아무말없이 내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면서 울지말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8월의 마지막날 바꿔서 가지고있던 시계를 돌려줬다.
헤어질때 돌려주겠다고 장난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길 바라면서.
무더운 여름에 내게 왔던 그사람은 그렇게 여름이 끝나면서 사라져 버렸다.
2002년 9월.
혜성처럼 나타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너.
길을 걷다가 연인들이 지나가는걸 보면 니 생각이 났어.
니마음을 받아주기가 왜이렇게 힘이 들었을까.
싸가지의 메일에서 발췌한 글이다.
오빠와 헤어지고 비오는날 친한친구와 술먹고 주차장에서 뒹굴었던게 엊그제 였는데.
자존심이란 단어와 잡을수 없다는 생각들.
그것이 잊어야만하는 이유였다.
난 싸가지를 만났다.
영화도 봤다.
밥도 먹었다.
인상쓸때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버릇을 찾아냈다.
집으로 돌아올때 알수없는 설레임에 기분이 좋았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9월에 있던 싸가지의 생일이 오기도 전에.
내맘을 알아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복수였는지 어쨌는지.
생일선물로 잊어주겠다는 말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잊을수 있을것 같았다.
2002년 10월.
싸가지가 말했다.
지치지도 않냐고.
내가 돌아서겠다고 말해놓고 난 여전히 싸가지를 잡고있었다.
수원에서 술먹고 연락했던 그날.
싸가지는 나에게 무턱대고 행복하라고 말했다.
그리곤 바쁘다는 말과함께 연락을 끊어버렸다.
... 난 혼자서 기다렸다.
친구들이 물었듯이 내가 왜 오빠보다 싸가지에게 집착하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잡히지 않는것에 대한 집착.
그게 결론일뿐.
나의 연락에도 반응없던 싸가지가 답문을 보내왔다.
행복하다고. 행복하라고.
좋아하는사람이 생겼다고 좋은사람 만나라고.
난 부탁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았던 기대마저도 날아가 버렸으니.
내쪽에서 구차하게 붙잡을지 모르니까..
날 무시해달라고 부탁했다.
싸가지는 나의 부탁을 들어줬고 나역시 연락하지 않았다.
싸가지의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얼굴이 하얗고 까만 긴생머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주 예쁠거라는 생각을 했다.
2002년 11월.
나랑 닮은꼴인 녀석이 헤어진 남자친구 때문에 긴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녀석의 집뜰이를 하기위해 이천으로 날아갔던 추운 겨울날.
대화를 끊으며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에 급하게 핸드폰을 들었는데..
.. 놀랍게도 그건 싸가지였다.
첫눈이와서 생각나서 전화했다면서 내가 보낸 동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틀후.
그렇게 행복하다고 강조하던 싸가지의 모습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냥 설레이는 정도였고.
메일을 볼때마다 많이 미안해 했었다고.
..그래도 나만큼 자기를 좋아해줄 사람이 없을것 같아서 돌아왔다고.
싸가지는 말했다.
난 미안해서 울었다.
모두다 바보같이 믿었다는 사실에 화가나고 한심스러웠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싸가지는 언젠가 했던 약속처럼 하루에 한번씩 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래가사처럼 12월30일 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날 혼자두기 싫다면서 아직도 자길 좋아하냐고 물었다.
오늘 난 언니한테 전화를 한다는게
오빠 전화번호를 누른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