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신라 최고의 문화전성기 연 여걸
삼국통일의 토대 만든 카리스마와 용병술, 한반도 최초의 여왕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오히려 그 실체가 거의 간과되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녀의 영민함에 대한 에피소드, 즉 당태종이 보낸 모란꽃의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의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고사 외에 통치자 선덕여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선덕여왕 시기가 신라 최고의 문화 전성기였다는 사실이나 선덕여왕이 바로 신라 삼국통일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있었기에 신라는 한반도 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를 둘러싼 남자들을 카리스마로 단단히 움켜잡고 자신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이룩해낸 통치자였다.
- 어렵게 획득한 왕권
7세기 초엽 신라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원래 신라의 왕위는 부모 양쪽이 모두 성골이어야만 하는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으로 성골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7세기에 들어서면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성골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딸 승만(후일 진덕여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성골남자가 없다는 것은 성골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성골 다음 계급인 진골 남성 중 유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러나 화백회의는 당시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이던 진골의 김용춘을 왕으로 추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평왕의 딸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남성 지배 중심의 고대 사회에 여성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특히 남성 귀족들만으로 이루어진 화백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덕만공주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한 것은 파격 그 이상이었다. 화백회의는 김용춘과 덕만공주를 두고 군왕의 자질을 여러 차례 저울질하였지만 결국 덕만공주의 능력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나라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왕의 자질, 즉 통치자의 카리스마를 덕만공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계급은 성골이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왕위를 덕만공주는 자신의 능력으로 당당히 획득했다.
- 탁월한 인재등용
왕위에 오른 후 선덕여왕이 보여준 군왕의 능력은 바로 인재 등용에 있었다. 그녀는 남성중심사회의 여성통치자라는 취약점을 자신을 둘러싼 남성들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해결했다. 선덕여왕 옆에는 그녀의 카리스마 날개 아래 유순하게 그녀를 모시는 두 마리의 맹수가 있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그들이다.
선덕여왕은 먼저 김춘추를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옆에 두었다. 왕위를 두고 경쟁했던 김용춘의 아들이었던 김춘추는 선덕여왕에게 가장 큰 정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지 않고 그를 최고의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였다.
김춘추에게 외교전반에 대해 전폭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정적을 곁에 두면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선덕여왕의 탁월한 카리스마요, 용병술이었던 것이다. 선덕여왕 재위 시 김춘추는 단 한번도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가장 충실한 신하로 성실히 복무하였다.
또 한 명 선덕여왕의 탁월한 인재등용을 보여주는 사람은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원래 신라에게 멸망당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김유신 가문은 가야멸망 당시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계급체계에 충실하고 배타적이던 신라의 귀족들에게 멸망된 가야의 왕족은 쉽게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김유신은 명목상 진골일 뿐 차별받는 이방인이었다.
선덕여왕은 그런 김유신을 발탁하여 그에게 군사권 전체를 맡긴다. 신라의 순수 귀족이 아닌 김유신에게 군사권을 맡기는 것은 어쩌면 국가 전체를 위협하는 파격적인 인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능력만으로 평가하고 합당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멸망시킨 왕국의 왕족을 가장 충직한 신하로 삼을 수 있었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그를 충분히 견제하고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뛰어난 외교 전략으로 나라를 지키다.
선덕여왕 재위 때 신라는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한다. 웅대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조각들이 이 시기에 속출한다. 정치적 안정이 문화적으로 꽃핀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신라의 국외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원래 삼국 중 영토가 가장 작고 국력이 약했던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과 백제의 중흥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국가의 존립이 문제되던 시기였다. 이때 선덕여왕은 과감하게 견제와 긴장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외교술을 펼친다.
김춘추를 일본과 당나라로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배후에 동맹관계를 결성해 쉽사리 신라를 침범할 수 없는 외교적 방어선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적절한 외교를 통해 국외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은 신라는 부지런히 국력을 키워 마침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 그러나 고독했던 여왕
선덕여왕의 정치적 성공은 그녀의 개인적 삶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여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결혼을 하지 않았고 후사를 남기지도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재미있는 고사가 하나 전한다. 지귀라는 젊은 청년이 선덕여왕을 짝사랑하여 그만 상사병에 걸렸다.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간 여왕은 지귀에게 알현을 허락하였다.
여왕이 불공을 마치고 나와보니 기다림에 지쳤던 지귀는 그만 잠이 들어 있었다. 선덕여왕은 지귀를 깨우지 않고 그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주고 돌아갔다. 뒤늦게 잠에서 깬 지귀는 자신을 원망하며 타오르는 사랑을 진정치 못해 불타 죽었다.
이 고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선덕여왕은 매력과 미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녀로 인해 마음이 불타 죽을 정도였다면 어지간히 남자의 속을 태우는 매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사랑하였으나 정작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정을 줄 수가 없었다.
만백성을 다스리며 만백성의 연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왕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들지 않는 것이 국가 안정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택한 독신의 길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택한 사랑법이고 통치자로서의 카리스마였다.
선덕여왕의 존재감은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불리한 입장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절대 놓아 버리지 않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강인하고 총명한 여인이었고 고독을 감수하면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 타고난 정치가였다. 선덕여왕은 새로운 시대로 향해가기 전 징검다리로서 여왕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진 여성이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