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1345 , 2005-07-07 13:08 |
요즘 내가 매우 즐겨 보고 있는 드라마다.
방학이라도 12월달에 있을 임용 고시를 대비해서 공부를 해야하는데
공부 자꾸 하기 싫을 때 보면 엔돌핀이 팍팍 솟는 그런 드라마다.
김선아를 주축으로 정려원, 다니엘, 현빈 등의 주인공들의 매력에 폭 빠져서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imbc 홈페이지까지 접속해가며
주인공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처음에는 ,,, 재미있던 드라마가,,, 요즘 뭔가 쫌,,,,
드라마가 진행 될수록,,, 보면 볼 수록,,,, 깨름칙하다,,,,,,
흐뭇하게 웃으며 드라마가 끝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별로 그럴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느낌은 뭐지...-_-
내 눈에는 벌써 드라마의 결말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도 같고....
어쨌든,,,,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담은 속시원한 기사를 네이버에서 발견 해서 기쁘다.
ㅋㅋㅋ
↓ 네이버 기사 by 김헌식 (문화 비평가)
동전에는 양면이 있듯, 음지와 양지를 나눌 수 없듯, 아무리 좋은 작품도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 이름은 김삼순'은 칭찬 일색이다. 이건 문제다. 진보적 매체들까지도 나서는 바에야 40%는 따논 당상이었다. 좀 경계해야 할 점도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서 사람들은 내 얘기라며 맞장구를 친다. 이때 '나'는 남자는 아닐터, 이 맞장구에 집단적 무의식이 담겨있다. 김삼순의 코드는 나이 많고 뚱뚱하며 평범한 여성, 즉 사랑을 제대로 일구어가지 못하고 상처만 받아온 이의 감성적 마음풀이다.
마음풀이는 비속어와 욕을 통한 억눌림, 억울함의 해소와 카타르시스, 그리고 유쾌한 웃음이 곁들여진다. 일종의 맨털테인먼트(Mentaltainment) 요소를 적절하게 사용해 정신적인 해방을 추구한다.
실제 현실에서는 드라마의 내용과 반대라는 이야기임을 강조할 수 있다. 현실은 불안하고 억압되어있다. 만성적인 불안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감이 없는 현실,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 자기의 이상을 상대에게 투영시켜 안온함을 느끼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미디어 나르르시시즘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다.
나르시시즘은 김삼순에 대한 동일시가 일어나는 이유다. 여성들의 만성적인 불안과 불확실성을 김삼순이라는 인물이 드라마적 상황을 통해 풀어내고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드라마는 주인공의 나르시시즘이 기본이다. 현실의 불소통과 억압을 드라마 설정을 통해 풀다보면 나르시시즘이 강화된다. 심지어 유아적인 나르시시즘은 슬픈 전설과 그림일기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유아적 나르시시즘은 40%대의 인기에 필수 요소인 초등학생들의 시선까지 잡아둔다.
무엇보다 김삼순의 코드는 당당녀!,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와 행동을 보여주자!" 다만, 김삼순은 '당당녀 나르시시즘'의 전형이다. '당당녀' 행태는 주로 현진헌(현빈 분)이라는 여러 조직이나 관계가 아니라 남자와에 대응하는 말과 행동, 사고에서 드러난다.
현진헌은 재벌 2세이면서 나이가 어리다. 이는 복합적인 두 겹의 의미를 지닌다. 우선 재벌 2세는 우월한 지위를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힘을 말한다. 이 인물을 갈수록 돈으로 사랑을 우롱하는 '못된 녀석'으로 설정한다. 김삼순은 이러한 녀석을 엄하게 훈계한다. "세상을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라고. 나이가 어리다는 설정은 돈은 많지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낸다. 현진헌은 김삼순과는 반대다.
나이는 미묘한 위치 바꿈의 역할을 해낸다. 그녀는 자기 편할 때는 반발을 일삼는다. 그러나 현진헌이 반말하는 것은 못 참는다. 이를 통해 하나의 우월적인 존재감을 통해 통제감 심리(Flow)를 충족하고 있다.
여기에 또한 수직 서열화의 조직에서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는 비현실적이기만 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 대들고 싸우고 여기에 계약 연예에 사랑 실랑이까지 충족하려는 이유도 이해가 가지만 비현실적이며 유아적이다. 환타지의 유아적 변형으로 보인다.
하고자 해서 못할 말과 행동은 없는 당당한 그녀, 여기에 당당녀 나르시시즘은 당당녀라는 이름으로, 억압받은 여성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재벌가와 서민 가정의 이분법적 구도, 신데렐라 요소, 획일적인 삼각 관계, 비현실적인 인물 관계 설정, 치우친 일방적인 대화법 등은 묻혀 지나간다.
무엇보다 대화의 일방성은 나르시시즘의 전형이다. 내적 독백이 결국에는 드라마 상황의 결론이 되어버린다. 현진헌은 그 나르시시즘을 받아내는 인형이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얻은 결론이 아니라 이미 결론은 김삼순의 머리에 다 있다. 울음과 웃음, 직설을 통해 대차게 내쏟아 버리는 김삼순의 말속에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김삼순의 눈물과 표정과 말에 시청자 모두가 동일시를 이르면 집단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셈이다.
김삼순은 자기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해놓고는 현진헌의 계약 사랑의 문제점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계약 결혼과 돈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비난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 들여지지 않는 이의 억지로 보인다.
드라마는 그 점을 애써 부각시켜 김삼순에게 유치한 명분을 준다. 돈 있는 집안의 젊은애는 싸가지 없다는 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김삼순의 슬픔과 애달픔이 정당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김삼순 방식이라면 얼마든지 현진헌도 합리화가 가능하다.
여기에 김삼순은 자기애를 중심으로 이상화된 아버지를 잣대로 남자들을 판단한다. 이제 균형은 완전히 깨지고 김삼순의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진헌의 사랑과 아픔은 주변 장치에 불과하게 했다.
사실 현진헌의 처지에서 보자면 김삼순과 그녀의 어머니가 주장하듯이 잘못한 것은 없다. 김삼순 코드를 충족시키기 위해 드라마적 상황이 그렇게 몰아갈 뿐이다. 더구나 현진헌에 동일시하거나 편을 드는 사람은 없으니 더욱 손쉽다. 이는 헨리 킴(다니엘 헤니 분)의 사랑은 가볍게만 처리하고 희진(정려원 분)의 사랑은 진지하게 다루는 것과 같다. 즉 남성의 사랑은 부차적이다.
무엇보다 인생의 교훈을 한 가지씩 현진헌이라는 사장, 강자에게 약자인 김삼순이 홍콩 영화 식으로 가르치려 한다. 자신에 대한 확실성이나 지위가 약하고 열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반영임을 이해할 수 있다. 잘나고 부자인 사람에게 인생의 교훈을 당차게 일깨우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현진헌이라는 인물이 그렇게까지 인생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정작 중요한 것은 김삼순은 남자들이 싫어하는 유형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백마탄 왕자가 호감을 보여준다는 설정은 나르시시즘을 넘어 마스터베이션이다. 거꾸로 김삼순이 아니라 김삼식이 김삼순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여성들은 싫어할 것이 분명하다.
스탕달은 '사랑의 결정화 작용(love as a crystallization)'을 말한 바 있다. 사람은 상대 연인에게서 이상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호감을 느끼고 사랑을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결정화 심리가 있다. 사람은 약간은 알 듯 말 듯한 장치들에서 호감과 사랑을 느낀다.
김삼순은 오히려 그 반대다.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개인이 그렇게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과 관계 속의 드러냄은 다르다는 사실을 나르시시즘 속에 처박는다. 실제로 김삼순을 싫어하는 남자들이 드는 이유다. 못할 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거침이 없다. "나는 나다!" 그러나 그 억압의 일탈적 해방이라 쾌감을 주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해방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부담 혹은 고통이 될 수 있다.
김수현이 애용하는 방어적 공격성도 이 드라마의 중요한 감성 요소다. "나는 이렇다, 그래서 어쩔래?"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고는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혼자 운다. 상대는 이러한 공격에 난처하다.
삼순이 코드는 상대에게 무엇을 맞추어 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다. 이는 자기본위의 나르시시즘이자, 감정적 마스터베이션이다. 자기 식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현진헌이 사랑을 느낀다는 설정 자체가 병리적 자기애다.
당연히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의 성격이 있고, 매우 중요한 호소력의 기초다. 드라마가 성공하는 이유는 그 나르시시즘을 얼마나 많이 공감하게 끌어들이는가 이다. 김삼순은 이점에서 성공했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은 그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는 배타적이다. 상처를 입은 약자, 김삼순의 시각이 절대적으로만 보이게 한다. 나르시시즘 밖의 주변의 다른 이들의 관점은 가벼워진다.
"나는 나다!" 그러나 세상의 골치 아픈 문제는 "나는 나"라고 하는 이들이 서로 부딪히는데 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자면 이 부딪힘에서 승자는 항상 촌스럽고 대찬 우리의 삼순이다. 김삼순의 언제나 좌절은 부당한 좌절이다.
주인공의 의지가 좌절되었다고 반드시 선은 아니다. 현실의 불안과 불확실성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밀고만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상호성 속에서 풀 일이다. 김삼순의 현진헌에 대한 관계와 통제 의지는 이점에서 상호성이 부족하다.
이런 부족은 김삼순 혹은 여성, 남성을 떠나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는 요소이다. 자기일방성, 나르시시즘은 그것을 동의하는 이들이 많으면 인기는 치솟는다. 하지만 가상 상황 속 집단적인 자기 안위이다.
한 가지 마무리가 필요할 듯 싶다. 당당만이 선(善)이 아니며 당당하다고 문제가 멋지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혼자만의 자기 위안이다.
드라마는 이렇게 집단적 자기위안을 제공한다. 당당녀는 하나의 콤플렉스다. 모두 다 당당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성격에 따라 구사할 일이다. 더구나 실제에서는 당당함보다는 유연성이 현실적이다. 쓸데없는 당당함은 오히려 관계를 꼬이게 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유연성이 더 힘드니 하지도 못하는 당당녀의 환상에 매달린다.
이런 점에서 김삼순은 환타지와 현실의 사이에서 또 하나의 환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 여성의 행복이 남성과의 사랑에 달려 있는가? 고공의 인기는 이러한 점을 놓치게 한다.
글·김헌식(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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