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그리고 <어린왕자>
# 삶 속에서도 죽어있던 이들
각자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닫고 살던 레옹과 마틸다.
그들은 삶에 대해 그 어떠한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레옹은 기계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제거해 나가는, 외로운, 그러나 외로움이란 감정조차 죽여버린 듯한 살인청부업자,
그리고 마틸다는 어린 나이에 삶의 힘겨움을 넘어서, 체념만을 떠안고 사는 소녀이다.
마틸다는 장기결석 때문에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 애는 죽었어요.'소녀는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를 죽인다.
그러나 둘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 단 하나의 따뜻함을 통해 위안받는다.
레옹과 닮아있는, 레옹이 가는 곳이라면 언제나 함께하는 그의 유일한 친구인 화분과
마틸다의 상처투성이 마음을 유일하게 꼭 안아줄 줄 아는 네살배기 남동생.
# 노크, 그리고 문을 열다그러던 어느날, 마틸다가 그에게 우유를 사다주기 위해 밖으로 나간사이
그녀의 가족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만다.
'문 좀 열어주세요. 제발요.'
죽은 가족들을 뒤로하고 레옹의 방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마틸다.
소녀는 어린 동생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음에 비추던 단 하나의 햇빛을 잃고 곧 말라죽어버릴 화분과 같은 처지가 된다. 그녀는 그렇게, 처음으로 레옹의 차디찬 가슴에 노크를 한다. 살기위해. 간절하게.
그리고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만 익숙한채, 자기 스스로에게조차 참다운 인생을 선물하지 못했던 그가
문을 열고 소녀를 받아들인다.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했던 이들.
어쩌면, 서로 의식하지 못하였더라도 그 순간은 두 사람이 가진 상처가 묘하게 맞닿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 길들임은 책임을 동반한다레옹의 삶에 불쑥 들어와버린 꼬마. 익숙치 않은 변화에 스스로 놀라고 거부감을 느낀 레옹은 소녀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나한테 왜이러는거냐. 네게 잘해줬잖아
어제는 목숨도구해줬어
-맞아요 그 책임을 져야죠
내 목숨을 구해줬을땐 이유가 있을게아녜요
안 도와주면 오늘밤 죽어요 난 느낄 수 있어요
'나를 길들여줘, 제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떠오른다. 어린왕자에는 많은 '관계맺음'이 등장한다.
장미꽃과 어린왕자, 어린왕자와 여우, 그리고 어린왕자와 비행사.
서로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조금씩 한발자국식 다가갈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결국 <레옹>에서 소녀를 살린 살인청부업자와, 살아서 동생을 죽인 놈들을 죽이려는 소녀의 기묘한 동거는 시작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둘은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솟아나는 따뜻함을 느낀다.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어. 하지만 넌 그걸 잊어선 안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책임을 져야만 한단다. 너는 네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익숙치 않았던 어린왕자는 분명 레옹과 닮아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서로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조심스런 과정과 행복,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마침내 천천히 배워가게 된다.
http://blog.naver.com/dodanbari/86714975 '나는 내 장미꽃 한 송이가 너희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소중해. 왜냐하면 내가 정성을들여 가꾼 꽃이니까. 내가 물을 주었고 유리 덮개를 씌우고 바람을 막아주었어.나비를 보게 하려고 애벌레 두세 마리만 남기고 벌레도 잡아주었어.'
그는 아직 어리고, 순진하고 섣부른 행동으로 위기를 맞이하는 마틸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소녀는 레옹의 단 하나뿐인 장미꽃이기 때문이다.
어린왕자가 투정부리고, 귀찮게 하기도 하는 자신의 장미꽃을 사랑하듯이.
-..같이 떠나자 단둘이 말이야
-내가 걱정할까봐 거짓말하는거죠?
아저씨 죽는거싫어요
-네 덕에 삶이 뭔지 알게됐어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잠도 자고 뿌리도 내릴거야.
절대 네가 다시 혼자가 되는 일은 없을거야
이제 가거라 어서 가
사랑한다 마틸다
-저도 아저씨 사랑해요
ㅣlove you too, Leon.
레옹은 끝끝내 길들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음을 맞이한다. 마틸다로 인한 죽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레옹은 마틸다 때문에 죽었지만, 마틸다 덕분에 '삶'이라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순간에 레옹은 자신의 삶이 가장 빛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이별을 앞두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결코 화려하지도 않고 꿀처럼 달콤한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어떠한 말도 더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것이 서로를 살아있게 한 단 한마디였으므로.
지금까지의 그들의 웃음도, 그 말을 하며 흘리는 아픈 눈물도 모두 그 '사랑' 때문이었으므로.
그래서 그 짧은 대사는, 마음 가득 공명을 일으킨다.
# 사랑. 서로에게 내린 뿌리
내가 저 많은 별들 중 하나에서 살고 있을 테고, 그 별들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테니까.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쳐다보게 되면 모든 별들이 아저씨에게 웃어주는 걸로 보일거야. 그러니까 아저씨는 웃음을 나눌 수 있는 혼자만의 별을 갖게 되는 거지.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슬픔도 시간이 가면 다 잊게 마련이야. 아저씨가 슬픔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 때는 나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할거야.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내 친구로 남아있을테니까.
어린왕자와 비행사는 이별했다. 레옹과 마틸다는 이별했다. 그렇지만, 어린왕자와 레옹은 분명 죽음을 통해
삶을 얻었다. 어린왕자의 말처럼, 죽음이 그들이 맺었던 아름다운 길들임을 지워놓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틸다는 땅에 레옹의 화분을 옮겨심는다. 그리고 나즈막히 말한다.
-여기가 좋겠어요, 아저씨.
레옹은 마틸다를 통해 그의 소망처럼 '진짜 삶'에,
그리고 마틸다의 마음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스물 한 살에 다시 본 레옹.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저렇게 뿌리내릴 수 있을까?
길들임에 대한 책임감, 상처에 대한 두려움 이런것들 보다는
누군가에게 노크할 수 있는, 혹은 누군가의 노크에 문을 열 수 있는 용기를 가질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