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3067 , 2011-07-12 22:07 |
아프리카TV, PD박스로 알려져 있는 나우콤 대표이사 문용식씨가 쓴
<꾸준함을 이길 그 어떤 재주도 없다>에 실린 책꼬리 에필로그 제목은 "평생 마음에 진 빚"이다.
그는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하다가 <깃발-민추위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끔찍한 물고문을 견디다 못해 "김근태 압니다"라고 거짓 자백을 한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당시 민청련 의장이었던 김근태씨를 거의 불구로 만들고 었고
이에 대한 마음의 빚을 평생 지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내가 군대에 있을때 일어났던 깃발-민추위 사건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던중
몇개의 링크를 거쳐 "박혜정"이라는 이름이 눈에 띤 순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생각이란 실타래 같아서 20년여년전 그녀의 자살을 동아일보에서 신문에서 접했던 것,
그리고, 며칠동안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나와 동갑. 같은 학번,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색깔이었다.
전직 군인이 대통령이던 시절.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선명하게 惡한 적을 두고,
"적의 적"이 되지 않으면 적이 되는 엄혹한 현실에서 나와 그녀같은 회색인은 설곳이 없었다.
(사실, 회색인이 더 힘들지.....)
네이버에서 옛날 신문을 검색해보니 그녀의 죽음은 짧은 단신으로 보도되었을 뿐이다.
나중에 전해진 그녀의 유서는 이렇다.
숱한 언어들속에 나의 보잘 것 없는 한 마디가 보태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러나 다른 숱한 언어가 그 인간의 것이듯, 나의 언어는 나의 것으로, 나는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겠지.
뭘 할 수 있겠니. 내가 지긋지긋하게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음을 네가 모르지 않을진데
요구하지마, 요구하지마! 강요하지 말 것.
구체적인 것이다. 산다는 건, 살지 않더라도, 사는 것 같지 않더라도 숨쉬는 건 구체적인 것이다.
허파와 기관지와 목구멍과 코와 입으로 숨쉬고 있지 않니. 어떻게 우리가 관계를 끊고 살까?
없었던 걸로?
떠남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
괴로운 척, 괴로워 하는 척 하지 말 것.
소주 몇 잔에 취한 척도 말고 사랑하는 척.
그래 이게 가장 위대한 기만이지. 사랑하는 척. 죽을 수 있는 척.
왜 죽을 수 없을까? 왜 죽지 않을까?
자살하지 못하는 건, 자살할 이유가 뚜렷한데 않는 건 비겁하지만 자살은 뭔가 파렴치하다.
함께 괴로워 하다가 함께 절망하다가 혼자 빠져버리다니. 혼자 자살로 도피해 버리다니.
反省하지 않는 삶. 反省하기 두려운 삶.
反省은 무섭다. 그래서 뻔뻔스럽다. 낯짝 두꺼워지는 ....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음이다.
절망과 무기력, 이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앞으로도 사랑할 수 없기에.
욕해주기를.... 모든 관계의 방기의 죄를.
제발 나를 욕해 주기를, 욕하고 잊기를....
86. 5. 21.
김수영의 시를 들춰보며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은 세상으로 건너간 그녀를 잠시 기억한다.
아마 살아있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아픈 몸이
- 김수영 -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모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 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 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이제부터는
즐거운 골목이
그 골목이
나를 돌리라
ㅡ 아니 돌다 말리라)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
저 말(馬)도 절망의 소리
병원냄새에 휴식을 얻는
소년의 흰 볼처럼
교회여
이제는 나의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에
해묵은
1961개의
곰팡내를 풍겨 넣라
오 썩어가는 탑
나의 연령
혹은
4294알의
구슬이라도 된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