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통에 빠진 반지   neuf.
  hit : 1030 , 2022-08-28 02:02 (일)


아주 오랫동안 나를 세상과 갈라놓던 무언가가 치워진 느낌이다.
내가 여기에 있는 느낌.
설명할 순 없지만, 
여기에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 같지 않는 느낌에
나는 몹시도 외롭고 답답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주 오랜만에 
나는 여기, 있다.


.
.

지금은 본가에 내려와있다.
개강이 다음 주여서 그 전에 휴식기를 좀 가질 겸 목요일 저녁에 내려왔다.
목요일 밤부터 오늘까지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보고 싶은 드라마도 보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있다.


#금요일

부모님은 다 출근하시고 혼자 있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하는 생각의 8할은 '나는 왜 ~ 할까? (하지 못할까?)'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해서 그렇다', '~해서 고쳐야 한다'가 이어진다.

나는 이런 끊임없는 반추가 나를 지금껏 회복하고 성장하게 해준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추가 계속되면 문제가 하나 있다.
나의 문제에 대한 반추는, 필연적으로 사고의 내용을 부정적인 것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불만족스러운 내 모습의 원인을 찾다보니,
당연히 나의 부정적인 경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나의 삶이 부정적인 것밖에 없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똥통에 빠진 반지를 찾으려고 코를 박고 있으면
똥밖에 보이지 않고, 똥냄새밖에 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찾는 것이 빛나는 반지라 하더라도.

애초에 잃어버린 반지가 똥통 속에 있는 지도 확실히 모른다.
그냥 거기에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끊임없이 휘적거리고 있을 뿐.
실제로 거기 있는 지 없는 지는 모른다.
심지어 나는 그 반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더 나은 나'란 무엇인가?
실체가 있는 것인가?
나의 엉망이었던 어린 시절, 힘들었던 학창 시절
그 경험을 헤집고 외상의 부정적인 영향을 파고들면
그 안에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있는가 말이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어디까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만족한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에게서 부족한 점을 찾고
고치려고 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제부로.
똥통에 빠진 반지따윈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지금 이 모습 이대로 평생을 살 것이다.

좀 과장해서 다짐해보자면,
관짝에 들어갈 때도 지금 모습 그대로 들어갈 거야.
지금 이 순간의 성격, 생각, 외모 그리고 몸 그대~로.

왜냐면 나는 지금도 이미 완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다.
그동안 많은 노력을 통해서 나 자신을 갈고 닦아왔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나는 지금의 내 모습으로 충분하다.
이 정도면 매순간 나를 검열하고 채찍질하고 고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될 만큼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내가 오로지 할 일은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하는 것이다.
왜 못 하는 지,
뭘 해야 할 수 있는 지,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하고 고치고 할 필요 없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친밀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어떻게 해야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지?
뭐 애착이 문제여서 안정 애착을 형성해야 되고?
이런 생각 필요 없다.
그냥 친밀해지고 싶은 나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친밀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면 그만이다.

내가 지금 친밀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과거의 경험 때문이지만
내가 앞으로도 친밀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떄문이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지만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다.
과거는 내가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내가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통해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미래가 곧 나의 현재가 될 것이다.

그냥,
하면 된다.
느끼면 되고
살면 된다.



.
.

# 토요일 

어제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오늘은 좀 밖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식물원을 겸하고 있는 카페를 하나 찾아서 버스를 타고 갔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깔끔한 카페에서
내가 요즘 좋아하는 말차 음료를 하나 시켜놓고,
카페 옆 쪽에 마련되어 있는 하우스에서 식물들도 구경하고
다육이 화분도 몇 개 샀다.

내 것을 사고나니 엄마도 몇 개 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기 전에 엄마한테 전화해봐야지,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고.
그래서 카페에 와있다고 했다.
엄마에게 다육이 좀 사갈까? 물었더니 엄마가 좋다고 했다. 자기 다육이 좋아한다고.
그래서 사진 찍어서 보내준 다음에 엄마가 고른 다육이를 샀다.
기분이 좋았다.

카페에는 멋진 직원 분도 한 분 계셨다.
집 근처 카페였다면 번호를 드리고 연락달라고 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느낌이 좋았다.
원래 같았으면 이런 느낌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잘 느끼지 않으려고 했을테지만
오늘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게 두었다.

카페에서 일정 정리를 좀 하다가 엄마에게 태우러와달라고 했다.
퇴근하신 새아빠와 같이 밖에 나가서 저녁도 먹었다.
집에 와서 카페에서 사온 다육이도 꺼내보았다.
티비장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공간이 좀 좁았는데
엄마가 신이 나서 안방에서 협탁을 가지고 나와서
여기다가 놓으면 되겠다고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작고 귀여운 다육이 화분들을 놓으니 너무 예뻤다.
그리고 나서는 새아빠 핸드폰 재약정도 가입해드렸다.
엄마가 고맙다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의 애정이 느껴졌다.

그동안은 의식되지 못한 분노에 의해 튕겨져 나갔던 감정들이다.
상대의 감정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엄마에 대한 분노를 인정하니
한켠으로 다른 감정이 흘러들어올 자리가 생겼다.
나는 이로써 엄마를 미워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나니까
엄마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내가 엄마에 대한 분노를 잊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그 전엔 내가 엄마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엄마를 용서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 튕겨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엄마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보호해주지 못했고, 위로해주지 않았고,
아빠를 신고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에게 큰 잘못을 했고 나는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엄마와 이 문제를 앞으로의 삶 속에서 해결해나갈 것이다.
필요하다면 함께 상담도 받을 것이다.
물론 엄마는 쉽게 상담을 받으러 가주지 않겠지만
중요한 건 엄마의 거절이 아니다.
내가 계속 시도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나는 나의 욕구를 최우선에 둘 것이라는 점.
나는 나의 편이며 
나를 위해 분노할 것이다.
나의 모든 욕구와 감정은 중요하며 
충족될 가치가 있고 느껴질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천 년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 특히 친아빠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다.

'이까짓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난리냐.'
'이 몸뚱아리가 뭐라고 난리냐.'
'너만 참으면 된다. 너만 조용히하면 된다.'

나의 모든 욕구와 감정, 존엄성을 인정치 않은 친아빠.
내가 학대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나를 희생시켰던 엄마.
누구도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나마저도 그렇게 나를 내팽개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누군가 나를 보호해주고 사랑해주기를 간절히 바라왔다.

지금도 역시 그런 희망을 버리진 않고 있지만,
중요한 건 나는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지금부터 내가 나의 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보호해주고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 분노할 것이다.

.
.

내가 나의 이야기를 존중하기 시작하니까
엄마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란 믿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나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면
전에는 엄마가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아직 해보진 않았지만,
내가 나의 감정을 이야기하면 엄마는
'그랬어? 그랬구나.'라고 이야기해줄 것 같다.

진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나의 내적 시나리오가 바뀌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감정을 들어줄 거야.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거고
관심가져줄 거야.
날 궁금해할 거고
존중해줄 거고
날 배려해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할 거야.
왜냐면 난 중요하니까.
내 감정과 나의 목소리 역시 중요하니까.

.
.

구겨져 있던 나의 존재가
다시 펴지고 부풀어올라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던 나의 자아가, 
시원하게 기지개를 편다.

엄마
엄마는 최악이야
진짜 나한테 잘못했어
난 아직 안 잊었어
그리고 내가 불편해서 이 마음을 얘기하고 싶어지면
엄마한테 얘기할 거야
필요하면 상담 받자고도 이야기할 거야
왜냐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그렇지만 오늘 태우러 와줘서 고마웠어
다육이 사왔다고 기뻐해줘서 나도 기뻤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리고 좋아.




.
.

똥통에 빠진 반지같은 것은 없다.
내가 잃어버린 빛나는 보석같은 것도 없다.
그만 똥통에 박은 코를 빼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날씨가 좋다.
이제 가을인 것 같다.
억지웃음  22.08.28 이글의 답글달기

하나님 오랜만이에요,
선선한 날씨가 참 좋아요. 환절기 건강 유의하세요!

李하나  22.09.19 이글의 답글달기

오랜만이에요 억지웃음님 :) 날이 다시 선선해졌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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