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걸 - 삶은 구도의 과정   공개
  hit : 3513 , 2009-12-05 09:49 (토)
중국 전국무술대회에서 우승을 한후 영화 <이연걸의 소림사>(1979)로 데뷔했을때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그보다 어린 나이에 내가 어느 동시상영관에서 그 영화를 통해 그를 처음 봤을 때는 그로 부터도 수년이
흐른 뒤였다.

그날은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의 봄햇살이 따스했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조조프로를 볼 양으로 아침부터 도서관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버스를 타고 극장으로 날랐다.

그 당시 별로 친한 애도 없었고 중간고사 전날 극장에 같이 가줄 만한 간 큰 애는 더군다나 없어보여서,
괜히 말을 꺼냈다가 이상한 눈총만 받을 게 뻔해 내 작은 계획에 대해선 입밖에 내지도 않았던 터였다.

그 극장은 약간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위치해 있었지만 그다지 허름하지도 비좁지도 않은 그런대로 대충
이류급은 된다고 쳐줄만한 곳이었다. 소림사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처음으로 혼자 '극장출입'을
해보기로 마음을 정하며 별일 아니라고, 무슨 대수겠냐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면서 그날 첫프로로 상영된 소림사를 보고나서 다시 한번 볼 생각으로 지금은 
뭐였는지 전혀 기억에도 없는 동시상영프로를 겨우 봐주고 난후 영화가 다시 시작 되기만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누군가 내 등을 두드리는 기척을 느낀 건 바로 그때였다.
화들짝 놀랐지만 뒷좌석 비좁은 통로를 오가던 사람들의 우연한 부대낌이었기만을 바라며 모르는 척
꼼짝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손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내 등에 대고 나즈막히 속삭이는 게 아닌가.
당시 내가 앉아있던 곳은 극장 이층이었는데, 이층과 일층 사이에 있던 휴게실에서 좀 보자는 거였다.
어찌나 놀라고 무서웠던지 뒤도 안돌아 보고 후다닥 일어나 마침 조조상영이 끝나고 통로와 계단을
빼곡히 채운 채 무더기로 빠져나가던 인파에 재빨리 섞여 허겁지겁 일층으로 내려가  인파에 휩쓸려
극장 출구에 겨우 당도했다.

밝은 곳에서 날 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설마 더이상 날 알아보거나 찾아낼 수는
없을 거라고 안도하면서 급히 극장을 빠져나왔다. 
버스를 타기위해 극장 바로 앞에 있던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그 손이 다시 내 팔을 붙잡는게 아닌가. 잠깐만 얘기 좀 하자면서.

당황스럽고 겁이 나서 그 손을 냅다 뿌리치고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넜다.
그러나 그 사람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와서 집에 가야한다는 나를 한사코 제지하며 그럼 한 정거장만
같이 걷자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쳐다보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도 어둠침침한 극장 안 앞좌석도 아니고 
뒷좌석에서 내 까만 머리통이나 겨우 볼까 말까 했을 사람이, 싫다는 사람 팔을 붙들고 같이
얘기 좀 하자고 막무가내로 끈질기게 늘어지는게 어렸던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쉽게 보였구나 싶었다.
어린 여자애가 일요일날 아침부터 동행도 없이 혼자 극장 조조 상영프로나 보고 앉아 있었으니
우습게 보였대도 별로 할 말도 없지 않나 싶었다.
다음 날이 중간고사였다는것 까지 감안하면 보기에 따라 무지 한심한 꼴이 아닌가.

다행히 내가 타야할 버스가 곧바로 정류장에 도착했고 붙잡는 그를 물리치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 탔다.
나와 같이 탔던 모르는 사람들이 그가 따라 올라타지나 않을까 창밖을 두리번거리기 까지 했을 정도다.
모르는 사람 눈엔 우리가 대판 싸우고 난 애인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테지.
머리에 피도 안마른, 어린 연인 말이다. 그때만 해도 옛날인데.

혼자서 감행했던 첫번째 극장 나들이는 그렇게 정신없이 끝이 났고 다음날 시험을 어떻게 봤는지는
기억조차 없다.

만에 하나, 극장에서의 그사람이 순수한 마음에서 내게 그랬다면 나의 거절 방식이 상대방를 너무
무안하게 만드는 야박스러운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접근 방식 또한 어린 여자애를 몹시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것이어서 지금 돌아봐도 나로선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연걸의 소림사>로 시작된 혼자서 영화보는 나만의 작은 취미는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대학 2학년 가을에 그 피크에 이르러서 그때는 강의실에 얼굴을 내밀지 못한 날이 내민
날보다 훨씬 더 잦았다고 해야 맞을 정도였다. 

지금도 여전히 근사하지만, 해맑게 웃는 얼굴에서 빛이 나던 소년시절의 이연걸의 모습이 담긴
데뷔작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그시절 나의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도 함께 떠오른다.


검색을 통해 알게된 이연걸의 무술대회 전적 

이연걸이 우승한 전국무술대회는 중국무술의 메이져리그라고 할 수 있는 대회이다. 
각 지역구 대회를 거쳐서 시단위 대회를 하고 그 다음 도단위 대회, 그리고 그 우승자들이 겨루는 
전국대회, 이런 식으로 길게는 6개월에 걸쳐서 전 중국에서 시행되는 대단한 규모의 대회이다.
이연걸은 천진대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검곤창, 장권, 남권, 태극권, 자선권, 대련의
전 종목에서  5년 연속 우승을 거두어 '전능 5굴관군'이라고 불리웠다 한다.
부상으로 한해 쉬고 참석한 다음 대회에서 그는 또 다시 전종목 우승을 했다. 
그리고 산타라는 대련 종목에서도 우승을 했다. 마지막 다섯번째 우승할때 산타 종목의 결승전에서
맞붙은 사람이 유단항이라는 지금은 북경무술대학 수석교수인데, 당시 두사람의 대결이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6년 내한했을때 어느 기자와 가졌던 인터뷰 내용

《 ‘무인 곽원갑’은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전기 영화다. 곽원갑은 무도 정무문(精武門)의 창시자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무술인. 1900년대 초 중국이 외세에 힘없이 스러져가는 격동의 시기에 강직한
무술정신으로 영웅이 된 인물이다.
 
시사 직후 완성도가 높다는 평을 들은 이 영화는 주연 리롄제(李連杰)의 절도 있는
무술이라는 육(肉) 속에 진정한 무술정신이라는 혼(魂)을 넣었다. 내한한 리롄제를 만났다.》

―단순히 무인의 삶을 다룬 게 아니라 배우 자신의 삶을 많이 투영한 것 같다.

“맞다. 나는 곽원갑을 통해 삶이 구도의 과정이라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공교롭게도 곽원갑과 나는 8세
때부터 무술을 연마해 왔고 그가 죽은 나이와 지금 내 나이 42세도 똑같다. 처음에는 승리에만 집착하다
무술이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의 여정을 나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 것 같아
영화화를 먼저 제의했다
.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두 가지다. 첫째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참 의미를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마음이
너무 약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기복이 있다. 적은 외부에 있는 어려움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두 번째 메시지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사회에 폭력은 폭력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서방세계의 복수의 반복은 악순환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시대에 무술정신은 어떤 의미가 있나.

진정한 무술은 싸움을 안 하는 것이다. ‘무(武)’는 그칠 지(止)와 창 과(戈)의 합성어다. 창을 그친다는
것은 싸우는 것을 멈춘다는 것이다. 무술의 본질은 화려한 액션 뒤에 감춰진 정신이다
. 20여 년 동안
무술 영화를 찍어 왔는데 늘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에게 당한 것을 갚을 때 무술로 제재하는 규칙을
적용한 것 같다.
폭력은 절대 마음을 바꿀 수 없다. 무술보다 중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이다. 내가 무술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이 영화에 담고 싶었다
.”

―당신이 생각하는 무술의 단계가 있나.

3단계가 있다. 첫째는 손에도, 마음에도 칼이 있는 단계다. 최고가 되겠다고 무술을 연마하는 때다.
둘째는 손에는 칼이 없지만 마음에 칼이 있는 단계다. 상대를 직접적으로 해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오만과 승리에의 집착이 있다. 셋째는 손에도, 마음에도 칼이 없는 단계다. 절대적인 적이 없는
 단계다. 이 경지는 아마 종교적인 경지일 것이다. 무인 곽원갑 이후 내가 출연하는 무술영화는
종교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아 이제 무술영화는 안 찍고 싶다
.”

―싸움의 고수가 된 곽원갑은 결국 자신의 오만 때문에 가족을 잃으면서 급격한 마음의 변화를 겪는다.
당신의 삶도 비슷한가.

“영화보다 극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괴로운 시절이었다.(웃음) 젊을 때 고통은 육체적 측면이 컸지만 나이
들수록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 마흔이 가까워 오자 비로소 내가 처한 고통을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2004년 12월 쓰나미 참사 때 가족과 함께 몰디브에 머물면서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이 영웅처럼 보도됐다.

“난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웃음) 당시 호텔에는 국적도, 종교도 다른 200여 명이 있었다.
모두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

―앞으로 계획은….

“인생의 반은 영화를 찍겠지만, 반은 자선활동을 하고 싶다.
환경보호운동이 아닌 영혼보호운동을 하고 싶다.
프러시안블루  09.12.05 이글의 답글달기

1. 서울은 눈이 오네요.

2. 영화관안에서의 그 남학생 용기가 있었네요.
저는 그 나이때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여학생들의 긴 줄 앞으로 걸어가는게
쑥스러워 일부러 골목길로 걸어다녔는데 ㅎㅎㅎㅎ

3. 제 사내 메신져 PR메시지가 <고수는 손에도 마음에도 칼이 없다>인데요
출처가 이연걸 이었군요.
좋아하는 회사선배의 메신져 PR메시지에서 훔쳐왔거든요

티아레  09.12.05 이글의 답글달기

1. 함박눈이 왔나봐요^^

2. 그렇게 수줍음을 많이 탔던 소년 시절의 블루님,
무지 귀여웠을 것 같아요ㅋㅋ
저는 그런 (만만해 보이는) 애들 앞에서는
상당히 대범한 여자애처럼 굴기도 했다는~ㅎㅎ

3. 블루님이 다른분 일기에 단 댓글보고 이연걸 생각이 났어요^^
출처 확인도 없이 훔쳐오셨나봐요, 고수답지 못하게ㅎㅎ

소리비  09.12.05 이글의 답글달기

저도 이연걸을 참 좋아합니다. 인터뷰내용을 보니 더 좋아지네요.
진정 고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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