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의 사람 │ deu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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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쓰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야기를 만들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돌아오는 반응들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중학생 때 까지는 그런 일에 몰두했었는데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무슨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로 소설을 '끊었다.' 그러고 난 후에도 무슨 물건이나 상황을 보면 소설의 소재로 써야겠다,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이제는 내 마음대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한 줄도 제대로 써지지가 않았다. 소설은 왜 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설을 쓰는 것은 참 힘든데, 내가 만들어 낸 인물의 감정이 내 마음 속으로 그대로 흘러들어와 정말 정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이 드는 일인데 내가 그걸 왜 써야 하지? 단지 '나는 쓸 수 있다.'는 이유로? 소설을 쓸 수 있으니까 써야 하는 건가? 그림이나 마찬가지인 건가? 소설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소설을 왜 쓰는가? 사람들은 소설을 왜 읽는가? 이런저런 본질적인 고민들로 문장을 써내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다가 얼마 전에 중학생 시절 같은 커뮤니티에서 소설을 쓰던 친구를 실제로 만났다. 7년 간 온라인이나 통신 매체로 친구 사이를 유지해 오던 녀석인데, 온라인 친구가 이렇게나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아무래도 만나야겠다 싶어서 먼 지방까지 직접 가서 만나고 왔다. 만나서 릴레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각자가 생각해 놓은 소설 소재에 대한 잡담도 나누었다. 친구가 나의 소설을 보고 싶다고, 다시 쓰면 안 되냐고, 보챘다. 릴레이 소설을 같이 쓰자고. 깨달았다. 소설은, 읽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쓰는 것이다. - 쓰고 싶은 소설이 생겼다. 엄마의 시점에서 딸인 나를 바라보는 소설. 나는 엄마와 건강하게 소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하나 있다. 생각하는 방법도 사는 방법도 달라서 의견 충돌이 잦은데 그 때마다 나는 엄마를 이해시키려 하기 보다는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 들을 거야.' 라면서 설명을 피하고 입을 다물거나 성질을 낸다. 나는 그 날이 그날 같게 사는 것,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을 하면서 살 생각이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돈을 조금 적게 벌더라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날마다 의미 있게 살고 싶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어려운 시절을 살아서 그런지,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 지, 그런 생각은 없고 하루 하루, 그날 그날 한 치 앞만을 보고 산다. 내가 해외 교류 활동을 간다고 하면 쓸데 없이 그런 것은 왜 가냐며, 네가 봉사할 처지냐며.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하면 취업과 상관도 없는 학교는 뭐하러 다니냐며, 내가 학교에서 임원을 맡는다고 하면 그런 건 왜 하냐며- '교육' 이라든지 '배움' 이라든지 '경험' 이라든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다. 나는 정말 정말 답답하다. - 등록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만 벌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학교 활동도 조금씩 하면서 돈을 벌려고 하는데 휴학을 했으면서 그런 건 왜 하냐며 돈이나 벌라는 투로 말하는 엄마에게 나는 매번 짜증만 낸다. 엄마는 도대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 뭐랄까 솔직히 아직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다. 소설을 쓰면서 조금 이해가 되면 그 때 용기를 내서 직접 물어봐야겠다. - 아무튼 제목은 뭘로 할까. '강 건너의 사람' 으로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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