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러 권의 성폭력 치유서를 읽어왔다.
도둑맞은 인생,
이 그 시작이었으며
너 아니면 나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아주 특별한 인생까지.
책마다 받는 느낌은 다르다.
.
.
도둑맞은 인생,
을 읽고 든 생각은
'아,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무슨 감정의 소용돌이 같은 건 별로 일지 않았다.
아마 나와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12살에 납치를 당해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강간을 당하고
아이까지 낳아야 했던 그녀는,
나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나는 우리 집에서
아버지에 의해
'도망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적어도 아이는 낳지 않았다,
뭐 이런 식의.
그러니까
나와는 case가 다르기 때문에
강한 느낌은 없다.
너 아니면 나,
이 책은 자기 치료서이다.
어린이 성폭력 뿐만 아니라
데이트 강간까지 폭 넓게 성폭력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책을 읽을 때는
자기 치료를 시작할 수 있을 만한 단계도 아니었고
지금은 이보다 더 나은
'아주 특별한 용기'라는 책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잊혀진 책이다.
아주 특별한 용기,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친구같은 책이다.
읽고 있으면 속이 다 시원하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그동안 내가 혼자 속으로 끙끙 앓아왔던 것들에 대해서
공감해주고 있고
해결책이 있다면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다만 해외서라서 그런지
아직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는 무리인 것들이
해결책으로 나와 있는 경우가 있어서
그대로 받아들이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아닐까.
자기 애인에게
자기 가족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나아가 사회에게
내가 성폭력 피해자임을 당당히 알릴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황이.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지금 내 옆에 놓여 있는 책이다.
어떤 울다 회원분이 추천의 글을 올려 놓으셔서
그것을 통해 만나게 된 책이었다.
정말 나와 비슷한 case였다.
한국에서
나와 비슷한 나이에
그리고 비슷한 시기 동안
아버지라는 가해자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범 아닌 공범,
그리고 대학에 들어간 뒤의 탈출.
여러 상황들이 아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일단,
아,
나와 같은 사람이 한국에도 있구나.
나보다 더 먼저 산 사람도
이런 일을 겪고 있고
다 겪어냈구나.
나도 이렇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
하지만 알 수 없는 '질투'도 인다.
나는 아직 이렇게 못하는데
이 언니는 이렇게 하고 있다.
질투가 난다.
묘하게 질투가 나서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좋은 징조다.
나는 내가 질투한 여자들의 좋은 점을
스펀지처럼 흡수해버리니까.
결국은 넘어서서
질투하지 않게 될 때까지.
.
.
나는 조금 더딘 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집중을 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치유를 위해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잠시 미뤄두는
상실의 고통을
이제는 감내하고
완전히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이제는 필요할 것 같다.
이제 곧 친고죄가 폐지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법적인 흐름에 말려들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 놓아야 한다.
재판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너도 즐겼잖아'
'네 잘못도 있잖아'
라는 그 말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게.
내가 그 말에 상처 받는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그렇게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수치심
잘못된 죄책감
바로잡아 놓아야 한다.
피해 사실을 모두 떠올려서
기록해놓아야 하며
모든 것을 엄마에게 알려야 한다.
엄마 역시 증언을 준비해야 하고
가족들에게도 알려서
증언을 부탁해야 한다.
평소의 그 자식의 폭력적인 행동을
목격한 가족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알려야 한다.
물론 내가 알리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알릴 것이다.
내가 믿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알릴 것이다.
내가 힘들 때
지칠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나를 지탱해줄
든든한 지지기반을 마련해놓아야 한다.
내가 견딜 수 있게.
내가 지쳐 쓰러지지 않을 수 있게.
.
.
어제 내 딸 서영이에서
차량을 절도한 청소년 재판을 하는데
친구들이 써 준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을 보았다.
만약 그 자식이 끝까지 증거가 없는 것을 믿고
사실을 부인한다면
나도 친구들에게 탄원서를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울다 여러분께도
가능하다면 부탁하고 싶다.
.
.
내가 원하는 것은
누구를 감옥에 집어넣고 말고가 아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옳은 사람이 옳은 것이다'
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고 싶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는
언제나 강한 사람이 옳았다.
그가 늘 강했기에
그가 늘 옳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가 옳았지만
나는 약했기에
옳을 수 없었다.
그는 잘못이 없었고
잘못은 내게 있었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화가 났고
억울했고 슬펐다.
나 자신의 가치를 구겨버려야만
견뎌낼 수 있었다.
그가 내 가치를 무시하는데
내가 내 가치를 내세워서
내게 돌아올 것은
폭력,
뿐이었다.
.
.
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다.
그가 잘못이다.
그가 옳지 않다.
내가 옳다.
물론 그가 이 점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한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의 모습을 보면
절대 그럴 리가 없으므로
나는 법의 심판을 통해서
그가 틀리고 내가 옳음을 증명할 것이다.
.
.
그가 유죄이고
내가 무죄임을.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두 팔 두 다리 다 뻗고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내 곁에 두고
소중하지만 아직은 믿기 힘든 사람들은 잃어야 한다.
그 상실의 아픔을 내가 잘 견딜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라며
나 자신을 탓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는 나와 연애하기 시작할 것이다.
오로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힘든지 힘들지 않은 지
내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지
그것의 결과가 어떻게 됐든
오.로.지. 나만 생각할 것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내 피해 사실을 말하는 '언어'를 갖는 일이다.
어디다 말 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
말을 할 수가 없다.
말 한 다음에 속이 시원하고
뭔가 인정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럼 누구에게 말해야 그런 느낌이 들 수가 있을까.
집단 상담을 한 번 가봐야겠다.
얼른 3월 말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