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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李하나
 옆에 있어주는   trois.
조회: 2696 , 2013-08-04 19:35







이따금은 그런 생각을 한다.
성폭행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라고.

내가 그 단어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다시 한 번
두드려맞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그저 나를 표현할 단어를 찾고 있을 뿐인데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씩
폭행의 피해자가 되는 느낌이다.


.
.


어떻게 하면 
나를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성폭행인 건 맞지만

'나는 성폭행 당했어요'
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언제나 스스로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짓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저렇게까지 과격한 표현까지는 필요 없는데.
아주 조금 더 온순해도 괜찮은데.
음,
어떤 표현이 좋을까.



성과 관련된 폭력을 겪었던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들이
조금 더 다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어떤 단계,
단계라고 말하기는 조금 뭣하지만,

그러니까 얼만큼의 과정을 겪었느냐에 따라
필요한 언어는 조금씩 다르다.



연애와 마찬가지다.
헤어진 직후에
헤어진 연인과 끝나버린 연애에 대해 표현하는 것과
헤어짐의 고통을 다 견뎌내고 나서 하는 표현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사람마다 그 차이는 다르겠지만,
확실히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
.

성과 관련된 폭력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겪어내고 난 다음에는
조금 더 정제된 언어로
나를 표현하고 싶게 된다.

하지만 그런 언어가 마땅치는 않다.





.
.



가끔은
내가 세상에 나서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여러분들도 잘 살 수 있어요
라고 광고를 하는 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경험자의 입장에서
똑같이 성과 관련된 폭력을 겪었다는 오프라 윈프리의 자서전이나
멘트보다는


바로 내 옆에서 나를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나에게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고
훨씬 더 많은 의지가 되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확실히 이 편이 맞다는 생각이다.


함께 해주면 된다.
그 힘든 시간을
옆에서 손 꼭 붙잡고
같이 있어주면 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자신의 몫이다.
아무리 대단한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오래 상담을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만들 수는 없다.

모든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고
모든 치유 역시 스스로가 해 나가는 것이다.

조력자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을 그저 함께 해주는 것.



함께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 없느냐가
치유를 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 짓는다.




.
.


그렇다면
매스컴에 나와서
불특정 다수에게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멘트를 하는 사람보다는


옆에서
언니처럼


"나도 그랬어.
누구라도 그럴 거야.
하지만 이것도 다 지나가.
내가 옆에 있어줄게.
같이 있어줄게."

라고 이야기해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