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구녀석들 두 명과 함께
교수님을 뵙고 왔다.
동아리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연습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교수님을 뵈러 같이 가자고 했다.
무작정 같이 떠난 길,
결국은 교수님 집으로 들어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고,
결과적으로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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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하겠답시고
휴학을 했다.
도저히 이대로 그냥 넘어가고 싶지는 않아서
나름대로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면서.
이번에 아예 다 끝내고 넘어가버리겠다고.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고 어리석었던 것일까.
생각은 정리될 기미라고는 없이
질정없이 흔들리기만 하고 있다.
목표물을 조준하지 못하고
한 없이 흔들리는 조준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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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 결심의 시발점은,
결국은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 넘어가면
무슨 일을 하든 나는 결국 회의를 느끼고 말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열심히 살다가도,
한 순간 그것들이 무너져내리고
사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것들의 아래에,
해결하지 못한 집안 문제가 깔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덮어두면서
다른 것들을 아무리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 자신의 침해당한 인권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걱정하는 거냐고.
우선 나부터 챙겨야 하는것 아니냐고.
그게 순서인 거라고.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결심했고,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그 목소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목소리는
과거의 내가 내는 목소리였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그러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했던,
그런 집안 꼴을 납득할 수 없었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미쳐 날뛰던,
그 나의 목소리였다.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목소리는 커져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서든 그 목소리가 원하는 바를 위해
있는 힘을 다 해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특별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뿐이다.
그 목소리를 '들어주어야겠다'고.
하지만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아니, 마음을 정해놓고도 흔들렸다.
내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내가 설명하지 않아 알지 못하는 친구들과 교수님의 말로 인해.
지금은 휴학할 시기가 아니라는 둥,
생각은 정리하려 한다고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둥.
그런 목소리들이 한없이 나를 때렸다.
사실 그것 때문에 내가 흔들리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슴 한 구석에 그런 의혹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인 것이다.
자기 의심.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과
그것이 나의 극단적이고 관념적인 결정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둘 사이에서 나는 갈등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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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하나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동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쪽이든 좋으니,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지금,
갈림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느 쪽으로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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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생각의 수위가 위험해졌다는 판단이다.
더 이상 생각을 계속했다가는
이 늪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 글에 지금까지의 생각을 모두 정리해 부려 놓고,
당분간은 생각을 중지하고 몸을 움직여야겠다.
내가 하는 핵심적인 고민 중의 하나는,
이 일을 기어코 해결하려는 나의 노력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하는 것이다.
긁어 부스럼인 것은 아닐까,
세상을 덜 산 나의 객기인 것은 아닐까,
감정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이상적인 판단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절대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 판단만은 흔들림이 없다.
나를 14년 동안 성폭행한 아버지는 당연히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엄마 역시 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가 않다.
뭔가 왜곡되고, 거꾸로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바로잡고 싶어서 미쳐버리겠다.
이 미쳐버리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나인지,
과거의 나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나와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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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원하는 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마음이 여러 갈래여서 그런 것 같다.
이럴 땐 결정을 내리는 게 중요하다.
어쨌든 모든 마음을 다 따를 수는 없다.
내 몸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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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같아서는 다 해결해놓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더 욕심을 부리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
그게 가능할까.
아니지,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우문이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지, 가능하지 않은 지는
해본 다음에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교수님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을 때,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론 내가 원한다면 최대한 도와줄 수 있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라고.
문제는,
해결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해결하려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문제라고 다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가.
어째서 해결해야만 하는가.
그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냥 그러고 싶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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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하려 하는 게 맞는 걸까,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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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개새끼는 나한테 왜 그런 짓을 해서
내가 이딴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걸까.
그냥 내버려뒀으면 지금쯤
취업이나 미래 고민을 하고 있을텐데.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결정내리기 어려운 이딴 고민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단 말이다.
생각이 무한정 맴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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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 새끼는 감방에 처넣어야 하는데.
뻔뻔하게 잘 살고 있단 말이지.
내가 편지를 보냈는데도
조용한 이유를 이제야 확신했다.
내가 절대로 고소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당신은 친족 성폭력의 가해자고 나는 피해자다.
나는 당신을 더 이상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을 때,
그가 엄마에게
'그거 하나가 쓴 거 맞아? 당신이 쓴 거 아니야?'
라고 물었다고 한다.
내가 지난 날 동안 얼마나 병신같이 찍소리도 못 했으면
그 문자를 내가 쓴 것인지 의심을 하는 걸까.
그와 떨어져 살게 된 이후로부터야
그를 마음껏 미워하게 되었지만,
그 전엔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못했던 것이다.
그 시절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에
내가 고소를 하리라는 생각은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적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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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적이든, 인정적이든.
어쨌든 나는 그가 회개하고 나한테 사과를 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가 이제와 나한테 사과할 거라면
지난 14년 동안 그렇게 거짓말을 해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엄마와 셋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그는 그 짓을 계속 했다.
벗은 몸과 성교 사진을 찍어주면
다시는 낮에 집에 오지도, 밤에 방에 들어오지도 않겠다던
그 친필 각서는 필요도 없는 종이 쪼가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와 반성?
벼락을 맞지 않는 이상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더 뻔뻔하게 나왔으면 나왔지,
절대로 곱게 나에게 미안해 할 리가 없다.
미안함을 느꼈다면
애시당초에 14년 동안 그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열심히 자기 방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 나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지도 모른다.
나만 열심히 그를 생각하며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내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자의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내가 강하고 그가 약하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지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힘을 줄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법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사회적인 시선.
이 두 가지를 이용해서
나는 그가 나에게 무릎을 꿇게 만들고 싶다.
그러지 않고서는 14년 동안 쌓인 분노가 풀릴 것 같지가 않다.
14년 동안 쌓여왔던 분노가.
그에 대한 분노,
엄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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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마음은 거의 굳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2%가 부족하다.
뭐가 부족한 걸까, 답답해 미치겠다.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그 2%가 없다.
논리는 완벽한데,
생각은 정리가 되었는데
정작 행동이 나가지를 않는다.
그 확신이 없다.
어째서일까,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무엇이 계속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일까?
고소라는 절차가 막연해서?
나한테는 너무 먼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면 일단 간단한 일부터 시작해보자.
그래,
너무 큰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까운 모래는 집어들 수 있어도,
산을 손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이제 뭔가를 좀 하자.
어쨌든 뭔가를 할 거라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쉬운 결정은 의미가 없는 법이지.
어렵게 내린 결정이 중요한 법이니까.
말이 결정이지
당장 그 결정에 따라 무슨 행동을 할 지 막연하니까
결정 내리기가 어려운 걸 지도 몰라.
고등학생 때는
어떤 대학을 갈 지 고민했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대학을 갈 지,
아니면 내가 진짜로 가고 싶은 대학을 갈 지.
그 결정을 하는 거였어.
물론 그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가치관의 갈등이 있었지.
교육이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그 고민에 만약
대학 선택이라는 현실이 빠져 있었다면
나는 아마 뭘 해야 할 지 몰랐을 거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한 결정을 내렸으면
마땅히 다음 행동 결정이 있어야,
그 생각이 끝맺음이 되는 거니까.
지금 나는
심정적 결정은 거의 내려져 있는데
그것과 관련된 행동의 방향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거야.
그래서 자꾸 흔들리는 거야, 겨우 맞춰놓은 저울추가.
자,
나는 삶의 방향은 결정했어.
나 자신에게 떳떳할 거야.
왜곡되고 그릇된 것은 바로 잡을 거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할 거야.
그러면 이제 뭘 하면 될까?
나한테 도움이 되고 재미있을 만한 일을 해야지.
무슨 일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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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일하는 기업에 들어가서 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다음 학기에는 복학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어쨌든 가까운 곳에서 찾는 게 우선이다.
먼 데를 아무리 상상해봤자,
그건 정말 상상일 뿐이니까.
땅으로 걸어다니자.
상상 속을 날아다니지 말고.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길은 땅에 있는 거니까.
길을 밟아 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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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하다보면
자연히 다른 하나가 되게 되어 있다.
아직 안 되는 일은 아직 안 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성폭력과 관련된 일은
아직 시기상조인 듯 싶다.
그냥 해보고 싶은 것이지,
막연하기만 하고,
막상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지금 당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좋지.
두 가지 일이 다 하고 싶다면
두 가지 일 다 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휴학해서 시간은 남아 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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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행동의 결정이 남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