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버전
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李하나
 출근 이틀째   trois.
조회: 3400 , 2013-10-15 22:12

월요일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상담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NGO인데, 
아주아주 만족스럽다.
내가 평소에 일하고 싶어하던 성(性)과 관련된 곳인데다
근무 일정도 주3일로 내 기존 일정과 맞출 수가 있다.
하루 8시간에 시급은 약 8000원.

그냥 일을 시켜줘도 감지덕지할 판에,
이런 조건으로 일을 할 수 있다니.
기존에 하던 아르바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단 첫 째,
그 곳에서 나는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이다.

흔히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주지받는다.

해야 할 일은 매장마다 다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매장마다 비슷하다.
핸드폰 보고 딴 짓 하지 않는다,
장시간 쉬지 않는다,
앉지 않는다,
재료를 먹지 않는다,
친구들이 와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등등.

즉, 
수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성격 좋은 고용주가 있는 곳에 가도 이러한 원칙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저런 것들을 일 하면서 마음껏 하는 게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저런 것들은 하지 않게 되기 마련인데,
괜히 하지 말라고 하면 기분이 더 나빠지는
그런 원리인 것이다.
내가 마치 돈 버는 부속품이 된 것 같아서.
나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
사실 사장에게는 그렇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선생님'으로 불린다.
사실 나보다 기본 스무살 씩은 많은 분들인데,
내가 어려도 너무 어린데,
습관의 연장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도 나는 선생님으로 불리고
내 자리도, 내 컴퓨터도 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아무의 눈치 볼 것도 없이
내 할 일 끝났으면 그냥 가면 된다.
내가 일 하는 걸 보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도 없다.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뛰쳐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점심 시간엔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는다.
사장들 눈치 보느라 밥을 빨리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하루 종일 나로 있을 수 있다.
고객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고,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일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할 수 있다.




이런 자리를 찾고 찾고 찾고 찾고 또 찾고 찾았는데,
드디어 찾게 되었다.
감격이다, 감격.




물론 가끔 아찔할 때가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사무실에는 여러 가지 자료가 있는데
그 중에는 가해자 치료 프로그램에 대한 자료가 있다.
그 내용을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경험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

확실히 이 곳은 새 세상이었다.
하루에도 몇 통의 성폭력 상담 전화가 걸려온다.
나 혼자, 내 경험만을 생각하며 살았을 땐,
내 경험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전혀,
지금도 도처에서 수많은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일어나는 성폭력의 수만큼
성폭력을 예방하거나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거나
가해자를 치료하기 위한 다양하고 수많은 노력들이 존재한다.

나를 그렇게 넓은 맥락 속에 놓고 이해하니,
점점 사고가 트이는 느낌이 든다.
사실 아직 이 느낌을 어떻게 말로 정리해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
.


물론 아직까지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해방이 되었다면 이 곳에서 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란, 
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망이나 좌절이 아니다.

'수긍'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혹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내 안에 남아 있다.
나에게 남은 것은
그 모든 것들과 어떻게 사이 좋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과 친해지는 시기다.

친구를 사귈 때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데에는 시간에 따라 여러 단계가 있다.
그리고 대개 처음에는,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시기를 거친다.
서로의 장점은 물론이고 단점까지 겪으면서,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다시 싸우고 붙으면서
다져지는 그런 시기.

그런 시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아니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를 할 수 있는
그런 단계가 오는 것이다.


지금은 '이해하는' 시기다.
나는 지금까지는 이 아이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내가 이 아이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인정해주지 않았고,
보살펴주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친해지고 싶다.
설령 이 아이와 친해지느라고 다른 아이들과 조금 못 놀게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나한테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중요한 친구이니까.





.
.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그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답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답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고,
나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일을 겪었다.
아버지가 나를 성폭행했기에
나는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것이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팔자가 기구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냥인 거다.
이유는 없다.


엄마에 대한 미움도 거둬들이기로 했다.
우리 엄마는 왜 나를 구해주지 않았을까,
무책임하다,
엄마도 아니다,
나쁘다, 등등.

엄마는 나를 지켜줬어야 한다,
는 전제 아래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망의 굴레.

나조차도 어떻게 할 수가 없던 그 상황들에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엄마는 나와 별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고,
강하지도 못했다.

그저 나와 같이 약했을 뿐이다.
나는 약했지만,
약한 게 죄는 아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내 잘못인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랬을 뿐이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약했고,
나를 지켜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엄마의 잘못인 것은 아니다.

내가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상,
나는 나 자신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랬니,
왜 나를 구해주지 못했니,
왜 아버지를 이겨주지 못했니,

엄마를 향한 나의 원망은
속도를 붙여 고스란히 나에게로 꽂히기 때문이다.

약했던 엄마에 대한 원망,
약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

어째서 더 강하지 못했는가,



이게 과연 엄마에 대한 원망일까,
나에 대한 원망일까.





이제 그만 약한 존재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고 싶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야기시키는 능동적인 원인도 아니다.
충분조건도 아니고.


약하면 성폭행 당한다,
라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약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무력했던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내가 했던 노력들을 봐주자.
엄마가 했던 노력들을 봐주자.

내가 나한테 한 잘못들,
엄마가 나한테 한 잘못들,
피해의 상황에서 발버둥쳤던
산소 없는 어항 속의 금붕어들.




왜 도망가지 못했니
- 왜 나를 도망치게 해주지 못했니

왜 저항하지 못했니
- 왜 나 대신 저항해주지 않았니

왜 엄마에게 말 하지 않았니
- 왜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니

왜 아버지에게 화 내지 못했니
- 왜 아버지를 이겨주지 못 했니



견고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이상 풀리지 않는다.
끊어버리자, 저 고리를.
도망 가지 못했던 것,
저항하지 못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화를 내지 못했던 것,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되어버렸을 뿐이다.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안 그럴 것 같은데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그 때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7살 때 쌀 20kg을 왜 못 들었니?
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금이야 몸집이 커졌으니 쌀 20kg쯤은 거뜬하지만 
그 때는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이해하지 않고
지금의 기준에서 당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때 당시에 나는 도망갈 수 없었던 것이다.
쌀 20kg을 들 힘이 없는 7살 아이처럼,
나는 도망갈 힘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도망갈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도망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해야만 한다.
나의 행동을,
그 때의 나의 입장이 되어 이해해주어야 한다.

지금의 내 입장에서만 판단해서는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돌아가서,
이해하자.
그 때의 나로.

exo   13.10.17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좋은 일만 일어날 거에요.

李하나   13.10.19

감사합니다, A님!♡

티아레   13.10.17

아르바이트 잘 구했내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그 때도 지금도 아무런 잘못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대는 당차고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거예요.
무엇에 대해서도 자신을 비난하지 마세요.

나는 그래요.
언젠가 어떤 일이 있어도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후로 정말 그렇게 지내요.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런 정직하고 담담한 자기인식으로 충분해요.
놀랍게도 결과는 죄책감이나 자기 비난으로 괴로워하던 때보다
훨씬 나아요.
나는 내가 좋아요. 알면 알수록 더 그래요.
하나양도 그런 사람일 거예요.
자기 비난을 멈추세요.
그것으론 결코 더 나은 쪽으로 변화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맞게 될 뿐이죠.


티아레   13.10.19

프로이드가 말하는 성격구조 있잖아요..
그에 의하면 결국 치료란 이 성격구조의 변화를 뜻하죠.
이드가 지나차게 강하거나 초자아가 너무 강하면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이드와 초자아보다 자아가 강해야 건강하다고 해요.
쾌락원리만 내세우는 이드를 현실원리에 맞춰 적절히 조절하려면
자아가 그만큼 강해야겠죠.
하나양의 아버지는 이드가 지나치게 비대하고 강력한 반면
자아는 몹시 약한 성격구조를 가진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초자아가 너무 강해도 문제죠.
자신에게 비현실적으로 가혹한 요구를 하거나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실망스런 면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런 경우 지나친 자기비난 더 나아가 자기혐오, 자기학대를
일삼는 경우들이 있지요.

가족 중 누군가 이렇게 어느 한편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친 경우,
그러니까 극단적인 이드 비대 혹은 초자아 비대인 성격을 갖고 있을 경우
자녀 중 누군가는 그에 대한 보상작용으로(대부분 무의식적으로)
그 반대편 극단으로 치우친 성격구조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하나양 부모와 하나양을 보며 내가 느낀 건 그래요.
이런 맥락에서 내가 위의 댓글을 썼던 거예요.

하나양은 다른 건 몰라도 성폭행 경험에 대해서 만큼은
초자아의 목소리가 너무 크고 비현실적으로 가혹해요.
아이에게 바랄 수 없는 걸 요구하고 있지요.
그 상황에서 생존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무의식적으로 은수연 씨 같은, 말하자면 영웅이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까지도 들어요.
초자아를 이루는 건 이런 모든 비교와 타인 뿐만 아이라 은연중에
스스로 내린 평가나 판단으로도 형성되니까요.

두 사람은 경우가 달라요. 알고 있겠지만.
은수연 씨의 경우 폭력이 너무나 무지막지했어요.
생존 자체가 위협 받을 정도로.

암튼 이 부분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죠.
초자아든 어떤 컴플렉스든 하나양에게 비난을 하는 목소리에 대해
굳건히 침착하게 맞서길 바라요.

나는 진주같은 사람이야.
모든 불행과 고난을 내 방식으로 견뎌냈다고.
도움 주는 사람 하나 없었고
뭔지도 알 수 없고 영문도 모른 채 당하며 지낸
감당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난 그저 견디는 거 외에 다른 방도를 알 수 없었다고..

李하나   13.10.19

맞아요, 저는 제 자신의 성폭행 경험에 대해서 거의 의사나 연구자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가끔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신이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닐까, 하고 저도 제 자신을 어이없어 할 때가 가끔 있기도 하지요:) 모든 원인과 인과 관계, 결과와 대책까지 알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꽤나 뚜렷하고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 초자아의 눈을 편히 감게 해줄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있구요. 그런데, 꽤나 간단한 방법을 하나 발견했어요. 생각을 멈추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지금까지, 매순간, 그러니까 1분 1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 자각하지 못했었거든요. 그런데, 사무실에서 어떤 자료를 슬쩍 봤을 때, 거기 '생각 멈추기'라는 글씨가 쓰여있는 것이 보였어요. 생각 멈추기?
그 때까지 저는 생각을 멈추는 걸, '도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성폭행과 관련된 생각이 떠오르면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위에서 말했던,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을 따지고 고민하고 답을 내리려 하는 일의 연속이었어요. 머리를 하도 핑핑 돌려대니까, 가만히 있는데도 멀미가 나는 거 있죠. 토할 것 같고, 이러다 머리가 진짜 돌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일 때도 있었어요. 마치 컴퓨터가 과부하에 걸리는 것처럼.
그런데, 그 생각을 멈추는게, 도피가 아니라 현명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물론 그 일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 일과 관련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하면 그만이지, 숨 쉬는 내내 그 일에 관해서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예요.
예를 들어, 고소를 할 거면 하면 그만이지, 고소를 하기 전까지 내내 고소에 관한 생각만 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는 정말로, 정말로 그 생각만 하곤 했어요. 고소와 관련된 온갖 것들을, 그리고 더이상 생각할 것이 없으면 했던 생각을 되풀이 하곤 했지요.
이제는 그러지 말아보자, 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공부가 필요한 부분도 있으니까, 저와의 약속을 하나 하자는 생각도.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일은 없도록 하기, 했던 생각을 반복하지 않기, 생각을 멈출 수 있다면 멈추도록 하고 이것이 도피가 아니라는 걸 알기, 그래도 자꾸만 같은 생각이 반복된다면 다른 일을 해보기.
하루에 최대 2,3시간만 성폭행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공부하기. 생각만 하는 건 되도록 줄이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고민하고 공부하거나, 다른 사람과 관련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체하기.
놀라운 건, 단지 이것에 대해 깨달았을 뿐인데, 많은 것이 변한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혼자 있는 게 무섭지 않아졌어요. 전에는 혼자 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걸 정말 무서워했거든요. 왜냐하면 혼자 있으면, 성폭행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혼자 있어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초자아가 절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조바심치지 않아도, 난 잘 해낼 수 있다고. 절대 잊어버리거나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라고. 차근차근 다 해낼 테니까,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다 할 거니까.

티아레   13.10.22

"콤플렉스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실제로 삶을 통하여 그 최후의 바닥까지 다 퍼올렸을 때만이 극복된다. 우리가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오려면 콤플렉스의 토대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리게 한 것들을 반드시 쓰레기와 함께 모두 받아 삼켜야 한다."
- 원형과 무의식/ C. G. Jung

그래요. 성폭행에 대해 공부하기. 책를 읽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기.
꼭 피해야 할 것- 혼자 가만히 앉아 그 생각만 하는 것 그것도 반복해서.

李하나   13.10.25

콤플렉스의 토대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리게 한 것이 뭐고, 그걸 삼킨다는 건 무슨 뜻이고, 쓰레기는 어떤 거예요?

티아레   13.10.25

융학파 분석가 이유경님의 번역인데 좀 난해하죠. 독일어 원문을 직접 우리말로 번역한 거라 그건 알 수 없고, 영역본은 이래요.

As we know, a complex can be really overcome only if it is lived out to the full. In other words, if we are to develop further we have to draw to us and drink down to the very dregs what, because of our complexes, we have held at a distance.

우리가 알고 있듯 컴프렉스란 삶을 통해 완전(충분)하게 실현될(살아낼) 때만 진정으로 극복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더욱 깊이 성장하고자 한다면 지금껏 우리의 컴플렉스들로 인하여 멀리해왔던 그것을 우리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 그 마지막 찌꺼기까지 다 들이켜야 한다.

영역본은 이렇게 해석하면 될 것 같구요.
컴플렉스를 진정으로 극복하고 성장하려면 더이상 그것을 멀리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거겠죠. 오히려 적극적으로 실제 삶을 통해 충분하게 살려내서 최후의 찌꺼기까지 온 힘을 다해 살아내라는. 그랬을 때만 컴플렉스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마침내 한층 성장할 거라는 메시지 같아요.

난 경험을 통해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길고 힘든 과정이었지만요.
말로 전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 같아 그냥 융의 글을 인용했는데
번역이 더 어려워 더 난감하게 만들었네요^^

李하나   13.10.27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솔직해지라는,그런 말인 것 같아요. 맞아요,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는 순간, 거짓말처럼 깃털같이 가벼워지더라구요. 인정하지 못해 외면하고 왜곡하면 절대 풀리지 않던 것들이. 마법처럼 스르르 풀려가는. 솔직함, 참 중요하고도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 같지만 그 가치는 백번 말해도 아깝지 않지요. 솔직함, 전 이게 삶의 가장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13.10.26

잘지내고 계신거 같아 기뻐요! 항상응원해요^.^

李하나   13.10.27

감사해요, 꽃님♥ 부를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이름이예요. 불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부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 이름은 이런 것이어야겠구나, 하고 늘 생각한답니다. 꽃님도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