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럴 때가 있다.
아주 오래 전 일이 갑자기 새롭게 해석되면서
열이 받는 것이다.
그 때 당시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왜 기분 나쁜지를 몰라서 화까지는 안 났었는데,
오래 뒤에 다시 곱씹어보니 화가 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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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에 내가 하고 싶었던 치유여행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기 위해
한 단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단체 설립 때부터 끈질기게 같이 일하자고 했던 것을
거절하고 거절해왔던 터였다.
도저히 나랑은 안 맞을 것 같았고,
특히 그 단체를 이끄는 아이가 나와 성격, 가치관 면에서 모두 안 맞았기 때문에
계속 반려를 해왔었다.
그런데 내가 말한 프로그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보자고 하기에
그래, 개인적 차이를 극복하고서라도 들어가보자,
라고 결심하고 들어갔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두 달 정도 뒤에 그 단체를 나오게 되었다.
내가 어떤 단체를 그렇게 빨리,
무책임하게 나온 것은 철이 들고 나서 처음이었다.
나조차도 나의 행동에 의문이 들고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는 그 이유조차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무조건 나와야겠다는 생각,
여기서 더는 일을 못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목소리를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그랬는 지 알겠다.
내가 성폭력 치유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던 당시,
그 프로그램의 '여행'쪽과 관련된 부분에 전문화되어 있었던 그 단체의 장,
그러니까 나에게 계속해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던 그 친구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
과연 네가 현지에 인솔자로 갔을 때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경우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라는 질문.
나는 당시에 그 질문이 굉장히 불편했는데,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저 질문은,
장애인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장애인에게,
'좋은 프로그램이군요. 저희도 관심이 있습니다. 같이 해봅시다.'라고 말하고서는
'그런데 몸이 불편해서 잘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라고 물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얼마나 무례한 질문이었던 지가 새삼 느껴져서
화가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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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치유 프로그램을 하겠다면서
정작 눈 앞의 성폭력 생존자에게
'당신 그 피해 때문에 일에 지장이 있지 않겠어요?'
라고 묻는 것.
지양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편견인 것이다.
만약 객관적으로 당사자의 치유의 정도가 궁금한 거라면,
중립적으로 예의바르게 물어야 한다.
'조금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필요한 질문입니다. 불편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현지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과,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과.연.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전자는 편견을 배제하고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
오로지 상대방으로부터의 정보를 기다리는 태도이다.
후자는 이미 자기 안에서
'감정적으로 대처할 것 같은데'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애초에 질문이 아니다.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라는 말을 살짝 돌려한 것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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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편견이 성폭력 생존자들을 얼마나 화가 나게 만드는 지.
이런 방식으로 형성되는 편견이 소수자들의 사회 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방해하는 지,
자신이 거기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면서
소수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그 친구의 태도는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이 정도로 생각이 정리됐었다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 정도의 확신이 있었다면,
여기에 대해서 그 친구에게 피드백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그러면 더 같이 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조금 더 상처받기 쉬운 상태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화살을 맞은 것처럼 아파서
그냥 도망쳤다.
아쉽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더 성장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니
다음부터 그런 말을 듣는다면,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그런 질문은 옳지 않아요
그런 생각 자체도 옳지 않아요
편견을 버려주세요.
성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에 압도 당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더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폭력과 관련된 연구에는
당사자에 의해서 축적된 것들이 상당합니다.
생존자들이 모두 무력하게 그 경험에 압도당한다면
그런 일은 할 수 없었겠죠.
성폭력이라는 말만 들어도 움츠러들었을 테니까요.
제발 그렇게 보지 마세요.
물론 사람에 따라서 그 시기가 다를 수도 있고
그 정도가 다를 순 있어도
모든 사람이 성폭력 앞에 무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똑바로 마주보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맞써나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쩌면 당신보다도 더 강한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신중하세요.
편견을 내려놓고,
'성폭력 생존자'가 아닌
눈 앞의 상대를 보세요.
그리고 상대방에게 질문하세요.
'너는 어떤 사람이니?'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