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기를 더디 하라.
이건 잠언에 나오는 가르침이며 자주 내가 맘속으로 되뇌는 말씀중에 하나다.
난 화를 낼 줄 모르는 인간이다.
화가 나면 꾹 참거나 다른 기쁜 마음에 몰두해서 화났던걸 애써 잊어 먹는다.
내가 화를 잘 안내니까 니가 화내는 모습은 상상이 안가라든가 덕경님이 화내는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러나 이건 과거형이 되버렸다.
지금의 나는 걸핏하면 화가나서 참을 수 가 없고 인간들에 대한 서운함과 미칠것같은 얄미운 감정에 사로잡혀 씩씩대곤 한다.
요즘따라 아주 자주 화가 난다.
그리고 인간들의 뻔한 속이 다보여서 어쩔땐 그 본심들을 헤아리느라 사람들이 미워 죽을 지경이다.
속물이란 표현을 어떨때 쓰는건지 잘 모르겠는데 자주 사람들의 가식적인 속이 훤히 다 보여서 비위가 나빠진다.
난 왠만하면 구역질이나 구토를 하지 않는다.
튼튼한 내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점점 성격적으로 뒤틀리면서 구역질이 날 거 같은 기분이 이런거구나를 깨달아가고 있다.
점점 예민해지고 점점 좁아지고 점점 깊어진다.
나에게 이런 기분들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 밉다.
그러나 난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이라 인류의 적, 정의의 적, 민주주의 적 이런거에는 별로 비위 상해 하지 않는다.
비위 상하고 싶어도 난 그 내막을 잘 모른다.
물론 결국 그런 공공의 적도 넓은 의미에서 나의 적이지만 실감을 잘 못하고 넘어갈때가 많다.
사람들이 정치인들의 크고 작은 행태에 민감하게 분노하는걸 보면 어쩔 땐 부럽기 까지 하다.
나도 신문의 정치 경제 면을 보고 분노해봤으면.
그럼 뭔가 꽤 아는 거 같아 보이고 이 나라 이민족을 걱정하는 애국자 같아 보일텐데.
그런데 내 개인적인 상황으로 들어 오면 남들에게 참으로 말하기 민망할 정도의 쪼잔한 감정들로 몹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대부분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 별로 먼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친하고 가까운 친구들이다.
왜 저 나이 먹도록 이토록 생각이 안돌아가지?
왜 이 상식적인 상황을 대처하지 못하고 똑같은 실수를 연발하는거지?
접때 내가 분명히 내가 이런거 삼가해 달라고 말했는데 또 저러네..같은 것들로 화내고 있다.
내 나쁜 버릇중에 하나가 화를 혼자 잘 삭히고 상대방을 남몰래 미워하고 있다는거다.
겉으론 잘해줄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 때마다 쌓이는 불만과 화가 치미는 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속에 쌓인다.
이거 참 나쁜 성격이다.
남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이고 타인을 자기도 모르게 미움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행위다.
그래서 어느날 부터 요구라는걸 하기 시작했다.
난 담배연기를 무지 싫어해.그러니까 되도록 내 앞에선 담배를 좀 덜 피워줘.라든가.
난 제목이 안붙은 이메일은 성의 없어 보여서 싫어,그러니까 꼭 제목을 써줘.라든가.
난 예의없이 구는건 딱 질색이야.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지킬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라든가..
같은 사소하지만 사소하기에 남들에게 까다롭게 보일것 같은 요구들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까다로운 인간이란 평을 듣기 시작했지만 남몰래 화를 삭이는거 보다 덜 위선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방법, 새로운 상황들로 화가 치밀어서 그때마다 내가 화가나는걸 나도 미리 예방을 못한 채 당하기 일수다.
일단 내가 화가 나는건 내가 화를 내기 전까지는 나 혼자만 피해자다.
난 남에게 나로 인한 나쁜 영향력을 미치는걸 무지무척매우많이 싫어한다.
난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관계에서 오는 끈끈함을 귀찮아하는 본성이 있다.
많이 고쳤지만 아직도 난 개인주의를 사랑하고 개인주의를 일반화하는 정책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래서 남에게 화를 낼때도 무척 많이 참는 편이다.
그리고 내 속이 가라앉은 다음에 전혀 그때 일로 기분 상했다는걸 눈치못채게 나는 이러이러한걸 싫어해라고 말해서 또 똑같은 일로 화나는 일이 없도록 얘기를 한다.
그러나 감정이란건 그 크기와 모양이 나도 모르게 갑자기 덮쳐와 괴물처럼 날 삼켜 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그렇게 되면 난 어쩔 수 없는 내 화 괴물을 밖으로 끄집어 내서 상대방을 위협한다.
난 신랄하고 거친 입담을 갖고 있고 때론 지독한 독설가다.
평소땐 늘 좋은 말 착한 말에 더 능한 편이지만 어릴때부터 화와 슬픔을 혼자서만 삭히던 버릇 문이 오히려 독설이 더 발달했다.
왜냐면 겉으로 화는 내는건 딱 한번 한가지 방법으로 끝나지만 속으로 화를 내는건 혼자 여러가지 말을 지어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연습을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다양한 방법으로 비유와 은유와 새로운 어휘를 끌어내서 저주하는 연습을 해왔다.
이 수많은 연습의 겨우 백분의 일도 안돼는 어휘가 가끔 툭 튀어나오게 되지만 그 잠깐 튀어나온 문장은 금방 날 후회하게 만드는 신랄한 것이어서 나도 당황스럽다.
이렇게 되면 피해를 입은게 내 쪽이 먼저임에도 내가 더 미안하고 불편해지는 상황이 된다.
그럼 결국 내 손해다.
그러기에 역시 화내기를 더디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러나 화를 무조건 참기만 하면 결국 그것도 내 손해다.
그럴때 필요한것이 지혜라는거다.
화내기를 더디하면 지혜가 나온다.
지혜 이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운 단어인가.
딸을 낳으면 흔한 이름이어도 지혜라는 이름 참 의미있는거 같다.
이지혜.유지혜,백지혜,천지혜...
화내기를 더디하면 화라는 괴물이 나를 삼키게해서 이성을 잃고 상황판단을 미쓰하고 오바하는걸 막을 수 있다.
화가 나기 시작해서 그것에게 금방 먹혀버리면 상황 판단을 못하고 나중에 오해가 깊어지거나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도 있다.
일단은 참는게 좋다.
그러나 너무 오래 참으면 내 감정을 풀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너무 빨리도 너무 늦게도 안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