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버전
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디케이
 밤에 받은 전화   카테고리가뭐야
조회: 2967 , 2002-12-18 22:06
꼭 다른 사람들 다 자는 밤에 어디 나가고 싶고 누굴 만나고 싶고 뭘 먹구 싶구 얘기 나누고 싶어질때 그 허전함을 달랠길 없어 안절부절한 맘을 꾹 누르고 억지로 잠을 청하던 기억..

누구나 있을듯 싶어서 난 전화기를 꺼놓지 않고 자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친구나 동생들에게도 밤에 언제라도 전화하고 싶음 전화하라고 말하고 내 방 전용 전화기 번호도 알려준다.

그럼 가끔 밤중에 전화해서 내 밤잠을 깨우는 애들이 있다.
거의 몹시 힘들어하거나 몹시 답답한 맘을 달래길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요즘 점점 술먹고 밤에 전화하는 남자들이 생기는 바람에 이런 나의 열린 전화 정책을 막아야 하지 않나 회의가 들었다.

나라고 잘 자던 잠을 깨는걸 좋아하진 않는다.

단지 그 한밤중에 깨어 잠못이루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친구에게 그 고통을 달랠 좋은 상대가 되줄 수 있단 기쁨을 내 단잠의 기쁨과 과감히 바꿔주는거다.

밤에 잠못드는 사람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난 항상 대화상대를 찾지 못해 고통스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보냈다.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의 대화상대자가 되어주는 나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내 얘기를 남들에게 잘하는건 아니다.

그저 상대방이 하고픈 얘기를 끌어내고 그 맘에 필요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데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럼 내 맘은 누구에게 내려 놓나.

하나님께 내 속을 풀기도 하지만 같은 사람끼리도 대화란걸 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인지라 사람이 필요하다.
남자친구가 있을땐 남자친구가 역시 가장 편한 말벗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려한 솔로 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고 2003년 버전으로 새로운 남자친구 하나 장만해서 관리 감독에 들어가는 모드를 취할 기분은 아니다.

내가 가장 이 욕구를 충족하는 좋은 방법은 누군가 대화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을때 그 상대 역활을 내가 해주는거다.
그래서 상대방이 위로를 얻고 안도의 숨을 내쉬면 그 한숨속에서 느낀 짐의 무게의 가벼움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난 대리만족이란 단어를 싫어하지만 역시 대리만족이 주는 만족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난 내 전화기를 밤에 꺼놓지 않는다.

밤에 전화벨이 울렸다.1시 40분쯤..

맑고 발음이 똑똑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가 늘 기다리던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걔라는걸 알았다.
왜냐면 걔 전화번호만 다른 벨음악으로 입력해놔서 걔 전화가 오면 전화벨은 잔혹한 천사의 테마가 나온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라는 노래가사가 실린.

이상하게 얘랑은 얘기를 잘 못한다.
내가 평소에 잘하는 대화방식,익숙한 말투와 편안한 주제 전환..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무슨 말을 할까 그것만 찾다가 그냥 썰렁하게 전화를 끊어 버린다.

전화건 사람도 후회할지도 모르게 어쩜 그렇게 대화의 코드를 못맞춘단 말이냐.

그 애는 전화해서 그 2분 56초의 시간동안 약 4번의 한숨을 쉰거 같다.

뭔갈 말하고 싶어하는거 같은데 뭔가 찾고 있는거 같은데 도저히 그 기분에 맞춰줄 또는 말하고 싶어하는 답답함을 식혀줄 무언가를 찾지 못했고 나도 어부정 어부정 전화를 끊게 했다.

[술먹고 노는거 말고 뭐 다르게 노는거 없냐.]

대답해주고 싶었는데 아무 대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술에 취하고 매일 겜만 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자신이 싫은거다.
그런데 왜 그 속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했을까.
그저 한숨만 쉬다 끊게 만들었을까.

전화를 끊고 나자 그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는 반가움과 기쁨 그러나 그애의 그 뭔가 답답해 하지만 해결못한 채 허무한 끝맺음에서 느껴진 씁쓸함이 엊갈려서 침대에 누운채로 몸을 태아처럼 웅크리고 전화기를 꼭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심하게 조여오고 다시 전화걸어서 얘기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났다.
뭘까.
뭐가 그 애를 이토록 흔들리게 만들고 이토록 잠못들고 술취하게 만드는걸까.

대충 눈치는 간다.
그 애 4식구가 지금 뿔뿔히 흩어져서 살고 있다.(이유는 모르겠다)
그 애는 공부건 뭐건 군대 재대한 뒤로 모든걸 포기한거 처럼 정신없이 지내고 매일 술만 먹는다.
밥도 먹지 않고 친구집에 얹혀서 하루 종일 게임에만 파묻혀 현실 도피한다.

그 답답한 속을 생각하니 내가 돌거 같다.
왜,무엇이,어떤게,어째서,어쩌다가 그 애가 이렇게 한숨쉬고 뭔가 하고픈 말의 핵심을 말하지 못하고 다시 뒤돌아서게 만들었을까.

자신도 자신이 가장 힘들어하는게 어떤건지 감을 못잡는듯하다.
왜 가족이 다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그 애는 왜 자신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렇게 심하게 방황하는걸까.

가슴이 너무 아프다.
다가가 말걸 용기도 없어서 난 그저 걱정하거나 기도하거나 안돌아가는 원인분석만 하고 있다.

나의 아름다운 사람.
내게 첫눈에 반한다는 기분이 어떤건지 알게한 아름다운 기쁨을 내게 줬던 아이야.
제발 흔들리는 너의 뿌리를 깊이 박으렴.
내가 울어서 네 자리가 단단해 진다면 내가 더 울어줄께.
내 눈물이 네게 거름이 되길.

2002/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