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4211 , 2005-01-08 19:53 |
책 세권을 새로 사서 쇼핑백에 넣고 돌아오는 든든한 발걸음은 집에 오는 길을 가깝게 만들었다.
여름엔 역시 추리소설이 제격이야..
친구가 추천해준 추리소설의 고전부터 두권 고르고 호선생님이 말씀해준 이상문학상 당선작 책도 들고...이거면 7월 한달은 신날꺼 같았다.
지하철 오는 길에 책 한권을 뽑아 들고 읽으면서 왔다.
단숨에 30페이지나 읽었다.
그리고 집에서 마저 읽을껄 기대하며 전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40분을 참은 화장실을 가려고 잠시 들렸다.
그리고 시원한 맘과 몸으로 나왔다.
한 스무걸음을 시원하게 걸었다.
손발이 다 시원하단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책을 넣은 쇼핑백이 온데 간데 없는것이다.
얼른 화장실로 뛰어 갔다.
내가 들어갔던 맨 마지막 칸의 문을 열었다.
내 쇼핑백을 올려놓았던 자리는 깨끗했다.
한발 늦었다.
얼른 밖으로 나와봤지만 범인은 이미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버려을지도 모르고 나보다 먼저 앞서 나가 버렸을 지도 모른다.
내 가시거리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심 사람 맘속에 있는 작은 양심과 현명함에 기대를 걸고 역무실로 가서 물었다.
-아저씨! 여기 혹시 책 세 권들어있는 쇼핑백 습득한거 없나요?
-어이~ 여기 책들은 쇼핑백 들어왔나?
- ....
-없다는데요?
- .....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물건이 큰 물건이건 작은 물건이건 무척 속상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40분간 계획하고 꿈꿨던 생각들을 책세권과 함께 날려버렸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면서 쪼꼼 울었다.
혼자 있을땐 진짜 사소한 일로 잘 운다.
걍 눈물날꺼 같음 애써 참지 않는다.
맨날 뭐든 잃어먹고 다니는 나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그 새를 못참고 물건을 들고 가버린 작자에 대한 원망으로 화가났다.
주변에 재활용 쇼핑백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 다 의심스런 눈길로 보였다.
그렇지만 뭐 잃어버린 내 책임이 젤 큰걸..
누굴 탓하기 전에 상대에게 기회를 준 내 잘못이지..
서글퍼서 집앞 벤치에 앉아서 잠시 앉아있었다.
숨을 고르고 진정한 뒤 들어갔다.
오늘 좋은 시나리오 소재가 있다며 같이 쓰자고 제의해온 사람을 2주째 만났다.
건대까지 가는데 전철로 30분쯤 거리다.
읽을 책을 골랐다.
예전에 읽다 만 카프카나 읽어야지.
파트너는 술이 없으면 얘기를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난 컨디션이 안좋다며 커피마시자고 우겼다.
내가 좋아하는 걈에서 커피와 케잌을 먹으며 얘기 나눴다.
그렇지만 역시 말빨이 안오르는지 영 어색해 하며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는 파트너를 위해 술집으로 가자고 했다.
자칭 '내 방'이라고 하는 술집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역시 난 이야기 꾼이 아니다.
글을 쓸순 있지만 새로운 스토리를 줄줄줄 내뱉을 만큼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내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의 생각도 잘 감을 잡지 못했다.
역시 상대는 술이 들어가니까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난 술을 먹진 않았지만 쏟아내는 말을 점점 접수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게도 재밌고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러프하게 주고받은 말들을 엮어서 점차적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11시반에 자리를 떠서 나왔다.
술값과 커피값을 다 계산하게 만들어 미안했다.
그렇지만 형편이 못되는걸 어떻게...능력이 없음 뻔뻔하게라도 살아야지..
비오는 골목길을 거의 벗어날때쯤 뒤에서 누군가가 소릴 지르며 뛰어 오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 저 멀리서 뛰어오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의아하기도 하지만 일단 겁이 난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빗속에서 날비를 맞으며 뛰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술집 주인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얼른 내가 두고 온 카프카를 전해주곤 얼른 뒤돌아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 이렇게 고마울때가..
참 착한 아저씨다.
너무 고마워서 저 아저씨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기도해줬다.
그런데 희한한건 술집주인들은 모두 모두 착하고 친절하다는거다.
술집 주인치고 불친절하고 못된 사람 못봤다.
왜 술을 팔면 사람이 너그럽고 착해지는걸까.
다른데도 술을 파는 서비스 정신으로 장사를 하면 사소한 일로 시비걸고 싸우는 일따윈 없을텐데..
아저씨의 작은 친절 덕분에 몇일전 책 세권을 잃어버린 아픔이 치유되는거 같았다.
나두 앞으루 물건을 주우면 주인을 꼭 돌려줘야지.
오는 길에 카프카의 지독히도 염세적이고 씨니컬한 얘기가 잘 안읽혀 졌다.
비속을 걸으면서 집으로 바로 돌아왔다.
2004 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