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죄책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을 사온 아들에게 우리가 왜 가난하냐, 부자일 필요가 있느냐고 나무랐지만, 저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으면서 부자도 못되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싶었을, 아들의 의중을 짐작해 본 적도 있다. 부자 되고 싶은 생각 없을 바엔, 가족 모두 행복하고 싶었을까 아들은.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여자친구는 직업이 없었다. 얼른 교육비와 능력이 아깝다는 생각에다, 못하게 한다고 취직도 안 하고 결혼만 기다린 점도 그랬고, 가계를 혼자 책임질 아들도 안쓰러웠다. 어릴 적부터 아들은 직장 안 나가는 여자와 혼인하겠다고는 했으니, 이런 용단을 내리기까지 엄마에 대한 불만이 쌓여온 모양이다.
어릴 적 친구에게 “우리 엄마 집에 있다”, “나는 엄마하고 슈퍼 간다” 하고 자랑했을 때, 다 자란 아이들이 아무 말도 하려 들지 않을 때,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할 때… 특히 그랬다.
누구도 대신 못할 국가 사회적 대업을 이룩하지도 못 하면서, 엄마가 필요할 때 애들 곁에 없었다는 죄책감이다.
내 논문, 내 시편이 우리 학계 우리 시단에 무슨 공헌을 했나 반문도 자주 했다. 덜 유능한 내가 더 유능한 누군가의 기회를 가로챈 것도 같고, 자아 실현도 못하면서 모성 노릇만 제대로 못한 결과가 되고 만 것 같았다.
아기를 떼어놓고 공부하는 대학원생들과 논어(論語) 옹야장을 읽으면서, 공자가 나병 든 제자 백우(伯牛)를 찾아가 창 밖으로 손을 잡고 위로한 부분에서, 산상기도를 마친 예수가 내려오는 길에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고 고쳐주는 대목을 함께 토론하면서, 요즘 낯선 사람과의 악수 정도도 아닌, 나병환자의 뭉그러진 손을 잡거나 환부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공자의 인(仁)과 예수의 사랑이라고 했다. 두 성인 모두가 어머니의 사랑을 누리면서 자랐기 때문에, 공자는 아무리 제자이지만 거리낌없이 나환자를 뭉그러진 손잡고, 예수는 낯선 나환자의 물집투성이의 환부를 만져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사랑은 피부 접촉이라고 개념 정의 위에 세워진 가설이었다. 부모와의 피부 접촉을 누리며 자라는 아동은 누리지 못하는 시설 아동들보다 습진 피부병 등이 적다고 보고된다. 소화불량이나 정서적 안정감, 자신감, 친절, 도와주기, 동정심 등의 친사회적 행동발달도 앞서고, 지적 성취나 창의성 발달도 앞선 점수를 보인다는 연구보고가 쌓이고 있다.
6·25 뒤에 정신질환자 수가 의외로 적었다는 점을 외국의 정신의학계가 주목했는데, 그 원인은 한국인들이 가족의 등에 아기를 업고 체온을 나누며 키우고 한방에 함께 자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신성로마의 황제 프레데릭 2세는 언어자극을 실험했다. 고아를 두 집단으로 나누고, 두 집단의 고아 모두에게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등 모든 것을 꼭 같이 해주되, 한 집단의 고아들에게는 보모가 한마디도 못 하게 했다. 그 결과 보모의 말을 못 들은 고아들은 얼마 못 가서 다 죽었는데, 말은 쓰다듬어주기 등 애정 표시의 피부접촉 행동과 동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자 되기, 일억 만들기, 로또 등 황금숭배 그늘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연습도 못하며, 자폐 은둔 가학 자학에 방치되면 어쩌나. 꽃이 한껏 좋은 꽃4월에, 우리 국가 사회 학교 가정의 꽃, 우리 청소년들이 봄꽃만큼 아름답기를-. 적게 덜 먹고 입던 옷 꺼내 새옷처럼 기분 좋게 입고, 같은 집에 눌러 살며, 겉치레 출세와 성공은 강 건너 불로 구경하며, 하고 싶은 제 일에 몰두하며, 온 가족이 따스하고 느긋하게 참행복을 누리는, 내 아들이 차리는 제 세상, 심신이 건강한 아들네 가족의 보금자리를 상상해 본다. 자꾸 즐겁다.
서울대 교수·아동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