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상실의 시대이다.
이쯤 되면 일본 오덕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뭐, 오덕까지는 아니지만
일본의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덤덤하니까, 일본 작가들은.
한국 작가들은, 아파 죽으려고 하고.
서양 작가들은, 아픔은 니가 알아서 느껴라, 고.
그래서 나는 일본 문학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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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실의 시대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 그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니까.'
사실상
내가 이 소설을 읽은 다음부터
나를 지탱해주던 것은 저 말 한 마디였다.
한 없이 내가 불쌍해질 때마다,
나에게는 왜 자꾸 연이어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억울해지고 비뚤어지고 싶고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마다
떠올렸다.
'나 자신을 동정하지 말자.'
그리고 어느 웹툰에서 읽은 말도 함께.
'동물(짐승)은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스스로르 불쌍히 여기지 않고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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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스스로를 동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행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나를 불쌍해해봤자
위로 따윈 되지도 않고
오히려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릴 뿐이다.
동정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
정신 차리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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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주인공 와타나베 토오루.
나오코, 미도리, 나가사와, 기즈키, 레이코, 하쓰미.
하나 같이 병들어 있다.
이 중 세 명이 자살한다.
뭐, 이건 내 식의 해석이지만
적어도 나는 자신의 찌질함을 결국은 견디지 못해서
자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찌질함에 대처하는 자세.
찌질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바꾸겠다는 사람,
찌질하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는 사람,
찌질하지만 나를 사랑해줘, 하는 사람.
그리고 찌질한 것 같지만 그래도 살아봐야지, 하는 사람.
찌질함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좋다.
내가 스스로의 삶이 찌질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래,
뭐 사람이 찌질할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는 하지 말자.
이렇게 하자,
하고 힘을 얻는 소설.
괜찮은 소설이다.
십 수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소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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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꼭 일본어로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