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deux.
  hit : 2549 , 2012-03-20 12:20 (화)

양육비를 100만 원을 주기로 해놓고
60만 원만 주겠다고 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화를 내야 한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냐고.
그런데 나는 지금 망설이면서
전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내 자신이 한심하다.
도대체 왜 전화를 하지 못하는 걸까?




첫 째,
그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 싫고
그 사람과 다시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싫다.
그리고 대화를 마친 뒤에
나에게 찾아올
그 오장육부까지 불쾌하게 만드는 느낌이
싫다.
내 인생의 불행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것이 싫다.


둘 째,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언제나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 생기면
맞닥뜨리는 괴로움이다.
어머니는 어떻게 보면 이제 아버지와 남남이다.
그러니 돈 문제에 관해서 딱 잘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아버지와 부녀관계 하에 있다.
전화해서 '돈 만' 요구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그동안 안부 전화를 하지 않은 것,
앞으로의 관계 등 
지금 직면한 돈 문제 말고도 아버지와는 
쌓여 있는 것이 많다.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돈 얘기만 하자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
.


아직까지 연민의 연막이 모두 걷히지 않았나보다.



나의 고민은
과연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런 아버지라면
아버지로 대우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아버지로서 대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
.


전화를 해서 무어라고 할까?
지난 두 달 간의 공백은 어떻게 하며
이야기는 어떻게 꺼낼까?





-


아.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 알아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단지 돈을 매개로 한 관계로 전락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나는 비정상의 아버지와 정상의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일까.

애초에 이 관계가 
여타의 다른 부녀관계와 마찬가지의
정상적인 부녀관계였던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떤 방식으로 아버지를 대해야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내 마음 속에서 빙빙 맴돌아
도저히 나를 아버지에게 전화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한 번은 해야 하는 전화다.
당장 내달에 나의 학자금을 갚아야 한다.





.
.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문제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 양육비를 요구해야 하는가?
동생에 대한 양육비 100만 원?
아니면 동생에 대한 양육비 50만 원에
나의 학자금 50만 원?
하지만 나는 미성년자가 아니다.
법적으로 양육비 지급 대상자는 아니다.
'책임'의 논리 하에 돈을 달라고 하면서
인간적인 관계를 뺴놓고 
돈만 요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적인 관계를 집어넣으면 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딱 돈만 요구하고 싶은데
돈만 요구하기에는 객관적 정당성이 부족해서
인간에게 호소해야 하는데
그 인간에 대한 호소가 지극히 꺼려진다는 것-
이 결론이다.

나에게 가장 편한 방법은 법으로 해결하는 것인데
왠지 전화 한 통 없이 바로 법으로 나가는 것이
잘못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도대체 이 노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순히 법적 절차에 대한 상담을 해주는 곳은 많지만
이런 복잡한 과거와 현재의 관계
그리고 나의 심리와 법적인 것까지 모두 상담해주는 곳은
없는 것 같다.


.
.



아니면 엄마한테 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할까?
나는 솔직히 아버지와 대화하기가 싫다.
하지만 내 성격 상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전화해서
밝은 목소리로 돈만 요구하는 것은 잘 못 한다.
그렇다고 화내면서 돈만 요구하는 것도
나에게는 힘들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모든 부담을 어머니에게 지울까?

.
.




결론적으로.
문제가 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문제는, 
내가 '아버지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모든 고민은
내가 아버지에게 제대로 화만 낼 줄 알면 해결된다.
그런데 화가 나지도 않고
화가 나지 않으니 화를 낼 수도 없다.

왜 화가 나지 않을까?
화가 나는데 본능적으로 그 화를 억눌러버리는 걸까?

양육비를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화가 나지 않을까?
나는 왜 이리도 침착할까?


.
.



일단 전화를 시도하기는 해봐야겠다.
어쨌든.



전화 시나리오/


아버지. 나 하나야. 어, 지금 통화할 수 있어? 일 해? 그래. 잘 지냈고? 할 얘기 있어.

약속한 양육비 100만 원에서 60만 원만 넣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아버지 힘든 거 알겠지만, 우리도 힘들어. 엄마는 지금 제대로 일도 못 잡고 있고, 나는 학교 다니고 있고.
(학교는 안 다니지만,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한다고 하면 양육비를 주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니까.)
이 달에 동생 등로금 빠져나가고 내 학자금 빠져나가면 결국 아버지가 준 돈 중에 생활비로 남는 건
없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나 취업후 상환 학자금 자격 요건 안 되서 1학년 때 대출 받은 거 졸업하기 전에 다 갚아야 된다고. 처음에 내 실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번 달부터 상환 개시 됐어.
그러니까 처음 약속했던 100만 원 줘. 

내가 그동안 아버지한테 전화 안 했던 건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어. 어쨌든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우리를 버렸으니까. 동생을 데려다 키우겠다는 걸 우리가 데려온 건 맞지만,
그건 동생을 위해서 그런 거였어. 새엄마랑 같이 사는 것보다는 우리와 같이 사는 게 나으니까.
먼저 전화해 주기를 바랐는데, 아빠도 전화를 하지 않아서, 나도 우리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사는 구나,
하고 전화 안 했어. 

솔직히 나는 아직도 아버지 용서 못 해. 나는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적도 없고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도 없어.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용서하라는 거야? 멋대로 멀어진 다음 나보고 다가가라고? 
나도 아버지 딸이야. 아버지랑 성격 똑같아. 그렇겐 안 해. 

어쨌든 최소한의 의무는 다 해주길 바라. 평생 돈 달라는 거 아니잖아. 동생 성인 될 때까지는
의무적으로 한 달에 100만 원 씩 줘. 그리고 그 이상은 아버지 마음 가는 대로 해. 우리를 자식으로 생각한
다면, 조금의 미안함이라도 있다면 그 이상 해주는 거고. 그럴 마음이 없다면 최소한의 의무라도 다 해.
아버지 소득, 그리고 어머니 소득과 동생의 나이를 고려했을 떄 한 달에 100만 원, 과한 거 아니야.
그 중 반은 내 학자금으로 나가야 되고. 

아버지가 100만 원 안 주면 나 학교 그만두고 일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나 아버지 더 용서 안 할 거야. 이 이상 나랑 어머니, 그리고 동생 불행하게 만들지 마. 돌아오란 소리 안 하고, 다른 거 요구 안 하니까, 한 달에 100만 원, 양육비만 보내. 그리고 자식들이 먼저 아버지를 용서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어른으로서 먼저 우리한테 아버지의 행동이 어떻게 비춰졌을 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다면 아버지가 어땠을 지. 그래놓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무런 용서도 안 구한다면 아버지는 과연 먼저 아버지한테 다가갈 수 있을 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아무튼 잘 지내고. 수고하고. 다음 달 부터는 100만원 씩 넣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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