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와 그제,
이틀에 걸쳐 고등학생 때 친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기숙사에서 같이 살았던 친구들이었는데,
대학생이 되어서
몇 번밖에 보지를 못 했고
마지막으로 본 지가 1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나고 싶질 않아서
그동안 잘 만나지 않았던 면도 있었다.
하지만,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무서운 거냐고.
만난다고 해도 뭐 잘못되는 건 하나도 없다고.
만약 어색하더라도 죽지는 않는다고.
만약 서로 너무 변해버렸더라도
그 자리에 한 번 나간다고 죽지는 않는다고.
그냥 한 번 나가 보자고.
결과적으로 아주 즐거웠다.
잃어버린 학생 시절을 다시 찾은 것 같은
그런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아주 오랜만에 노래방에 가서 실컷 소리를 질러 보았다.
대학 친구들과는 노래방에 가도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다.
내가 요즘 노래에 흥미가 떨어진 건가,
했는데
이 친구들과 함께 가니
다시 고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시끄러운 노래를 틀어놓고
마음껏 소리를 질러댈 수 있었다.
사진도 찍고, 이것 저것 구경도 다녔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놀아본 것 같다.
언제나 놀기는 하지만
놀기 위해 노는 것일 뿐일 때가 많았다.
목적이 있어서 모여 노는,
그런 느낌이랄까.
내가 좀 예민한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친구들과는 아주 즐거웠다.
.
.
옛 친구들을 만나
추억팔이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 자신을 아는 방법은
혼자 자신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에게는
안과 밖이 있어서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
나에 대한 기억은
나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의 기억에는 없는 나의 모습이
다른 누군가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흐릿하고 불완전했던
나의 그 시절이
뚜렷한 색채와 형상을 가지며 완성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
.
친구를 잃는다는 건
그 친구와 함께한 그 시절의 나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친구와 나누어가졌던
나,
자신을.
그래서
초등학생 때 찍었던 사진을 보면
그 시절을 알 수 있듯
초등학생 때의 친구를 만나면
그 시절의 나를 알 수 있게 된다.
그 시절의 우리를.
중학생 때의 친구를 만나면
중학생 때의 나와 우리를
얻는다.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있었던
그와 나를,
그를 만나지 않음으로써
어딘가의 협곡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던,
그와 나의 모습과 시간을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친구가 중요한 거구나.
.
.
친구들은 하나같이 예뻐졌다.
하도 남자 같이 굴어서 모든 남자아이들이
'형'이라고 부르던 아이도
이제는 어엿한 여자가 되어
남자친구도 사귀고
예쁘게 옷도 입고 화장도 했다.
이 아이보다 더 남자 같아서
남자 친구라고는 생기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이도
아직 화장은 하지 않지만
등이 뻥 뚫린 예쁜 티셔츠를 입고 나와
남자친구와의 사이에 대한
이런저런 자랑과 불만을 섞어 늘어놓는다.
나는 그 사이에서
배부른 소리 그만하라며 웃는다.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며
욕도 실컷 해본다.
셋이서 카페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를 쳐서
창피할 법도 하지만,
마냥 즐겁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 해놓는다.
이런 아기자기한 감성이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다,
고 생각하면서.
.
.
이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내 고등학생 시절을 스스로 회상해볼 때면
나는 늘 내가 울적하고 어두웠다,
고 표현했다.
교실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사회와 교육, 그리고 교사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조금은 특이한 아이.
친구도 별로 없고
잘 놀지도 않고
공부만 했던 아이.
하지만 이런 것들 모두
내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명제를 뒷받침 하기 위해
선택된 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명제란
'나는 아버지의 성폭행 때문에 학창시절을 빼앗겼다.'
이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
내가 아버지를 증오할 때마다
중얼거리는 문장 중의 하나이다.
그럴 때면
교실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책을 읽는 내 모습이나
남자 아이들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내 모습,
같은 걸 떠올리곤 했다.
아니,
같은 것 '만' 떠올리곤 했다.
좋았던 것들,
예뻤던 것들,
즐거웠던 것들
행복했던 것들은
절대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런 것들이 섞여 들어오면
나는,
성폭행을 당하는 와중에도 헤벌레 웃으며 살았던,
그런 사람이 되니까,
그러면 완벽한 피해자라는 나의 논리에
허점이 생기고,
어떻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행복할 수가 있냐며
나를 욕하는
내 안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의 학창시절을 그렇게
어둡고 비참하게 그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물론 머리로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려고 했으며
객관적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는 언제나
내 안의 울부짖는 누군가에게 지고 말았다.
나는 머리가 잡고 있는 그 마지막 실마리,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그 마지막
'알람'의 끝을 놓치지 않으려 붙잡고 있는 것이 다였다.
이제는 그 알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학창시절은
내가 표현하는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분명 있다.
좀 더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
-특히 남자아이들에게
좀 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
만큼은 아쉽다.
특히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은 점은
너무너무 아쉬운 점이다.
친구들은 언제나 나를 좋아해주었는데.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나와 친해지고 싶어했는데.
나는 그런 아이들을 언제나 밀어냈다.
무관심은 아니었다.
단지 무서웠을 뿐.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내가 다가가도, 나랑 가까워져서 내 진짜 성격을 알아도
나를 여전히 좋아해줄까.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친구일까.
그걸 몰랐었다, 그 때는.
그래도 여전히 친구가 될 수 있는데.
하지만
기숙사에서 보낸 3년은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상.
나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일상.
나는 늘 규칙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기로 유명했다.
5시 30분이나 6시 쯤에 눈을 떴다.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샤워실로 가 씻은 뒤
교복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자습실에 내려놓은 뒤에
학교 공원으로 나간다.
우리 학교엔 공원이 있었는데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식물들, 꽃,
그리고 새들이 있었다.
봄이건 여름이건 가을이건 겨울이건
그렇게 새벽마다 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다.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는 시간.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이슬로 촉촉해진 정원을 걷는다.
소나무, 플라타너스 나무, 매화 나무, 살구 나무,
벚꽃나무, 이름 모를 나무들을
아침 인사하듯 자세히 살펴보며.
그 정원에는
찾아오는 새들도 많았다.
아침에는
늘 그런 새들의 소리로 정원이 가득차곤 했다.
6월이 되면
나는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정원에 나가곤 했다.
6월엔 꾀꼬리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샛노랗고 알맞은 몸매의 꾀꼬리는
정말로 예뻤다.
주황색 부리는 전체적으로 꾀꼬리를
말랑말랑한 이미지로 만들어주었고,
날개쪽에 있는 검은색 문양은
가볍지 않은 인상응로 균형을 잡아 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꾀꼬리의 노래 소리였다.
목소리가 좋거나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꾀꼬리라고 부른다.
꾀꼬리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왜 그런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꾀꼬리의 소리는
다른 새소리하고는 정말로 달랐다.
참새, 직박구리, 박새, 까치, 까마귀,
비둘기, 딱따구리 등 많은 새들의 소리를 들었고
그 새들의 노래소리 역시 좋았지만
그 소리들은
뭐랄까
내 귀로 들려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꾀꼬리 소리는
내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 노래 소리는
귀 뿐만 아니라
배를 통해서도 내 안에 들어오고
발을 통해서도 내 안으로 들어오고
목을 통해서도
코를 통해서도
나에게 전해져왔다.
귀로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새들이 멀리 떨어져 울면
그 소리는 그 거리만큼 떨어진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단지
그 새가 있는 곳에서 아무 곳으로나 목적 없이 퍼져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꾀꼬리 소리는
마치 그 공간을 아우르는 듯했다.
발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퍼져나가 감싸안기 위한 소리인 듯 했다.
종이 치고
교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는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열심히 그 소리의 품 안에 안겨 있곤 했다.
절대로 나무 아래로 내려오는 법이 없는 꾀꼬리를
나무 어딘가에서 눈으로 좇으면서.
.
.
공원 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했고
차분했다.
결코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소음이 아니라
어루만져주는 노래 소리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연은 이러쿵 저러쿵 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나무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욕을 하지도 않았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평가하지도 않았고
질책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일을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게 할까봐 내가 무서워하는 일을
자연은 절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가 좋았고,
새가 좋았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쭉 뻗은 길을 걸을 때면
눈을 감곤 했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치면
정말로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갈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원통형의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갈라
가느다란 줄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바람은 그렇게 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곤 했다.
어딘가에서 얻어온 봉선화를 심어놓기도 하고
클로버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달팽이를 주워모으기도 했다.
가을이 되어
잔디가 적당히 마르기 시작하면
그곳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
서 있을 때는 잘 지각하지 못했던 느낌이 들곤 했는데,
내 눈 바로 앞부터가 우주라는 사실,
이었다.
우주는 대기권밖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내가 사는 곳 모두가 우주라는 것.
나는 지금 지구 표면에 붙어서
빙글 빙글 돌고 있는 것이라는 것.
참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가끔은 친구들과 같이 공원으로 피크닉을 나오기도 했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기숙사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에 남아 공부를 하곤 했다.
그럴 땐 사감의 감시가 덜했는데
우리는 공부가 하기 싫어지면
돗자리를 갖고 공원에 나와
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뒹굴거리곤 했다.
어떤 날은
80년에 한 번 내린다는 별똥별비를 보기 위해
새벽 5시에 기숙사를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 때는 11월이었는데
상상도 못할 만큼 추워서
우리는 각자 이불을 갖고 나와 깔고 덮으면서
별똥별비를 봤던 기억이 난다.
춥다고 소리를 지르고
목이 아프다고 징징대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 했었다.
.
.
나에게는 별난 취미도 하나 생겼었다.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교실 내 책상 위, 자습실 책상 위,
기숙사 내 책상 위나 내 방에는
항상 회초리 길이의 나뭇가지가 두 세 개쯤은 모여 있었다.
적당히 마른 나뭇가지를 벗겨내면 나오는
그 뽀송뽀송한 살과
아기 사슴같이 보드라운 갈색의 나뭇가지가
너무 예쁘고 좋았다.
내가 교실에 나뭇가지를 주워모으기 시작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청소 시간에 보니 사물함 앞에
크고 긴 나뭇가지가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왠 나뭇가지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반 남자 아이들이 오더니
"하나야 우리도 나뭇가지 주워왔어ㅋㅋㅋㅋ"
하면서 저들끼리 나뭇가지를 갖고
노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그렇게 우리 반엔 나뭇가지들이 돌아다녔다.
이 취미에 대해서도
나는 졸업한 뒤에 줄곧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 아이가 나뭇가지를 주워모으다니.
더군다나 심심할 때면
그 나뭇가지를 깎아 귀이개니 비녀니
하는 것들을 만들기까지 했다.
물론 나 혼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뭇가지 공방의 중심은 나였다.
이 무슨 자폐증 같은 취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뭇가지가 없어지면
심각한 얼굴로 찾아다니고
교무실까지 돌아다녔다.
"선생님, 제 나뭇가지 못 보셨어요?"
하면서.
그러다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것이 발견되면
"선생님, 이거 제 나뭇가진데요."
하면서 다시 돌려받거나,
아니면 너무 길어서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뺏기기도 했었다.
친구가 허락 없이 내 나뭇가지를 가져가면
정색을 하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참 창피한 행동이었다고,
떠올리기도 싫어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뭐, 자폐랄 것 까지 있나 싶다.
재미있는 취미였다.
정말 예뻤으니까.
그리고 결국엔 모두들 재미있어 했어.
나도 좋았고, 다른 사람들도 좋았다면
그건 그런 대로 좋은 거야.
그리고 누가 뭐라든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
좀 특이한 여고생이었을 뿐,
자폐증이랄 것도 우울증이랄 것도 없다.
이 부분도
내 안에 걸렸던 것들 중 하나였다.
기억을 비추기 위해
빛을 비추면
어떤 유리벽이 거기에 씌워져 있어서
빛이 반사되어 튕겨나오고 마는,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 기억에 빛을 비추어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좋은 일이다:)
.
.
옛 시절을
편안한 마음으로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할 수 있게 되어 참 좋다.
앞으로도 옛 친구들을 많이 만나야겠다.
그 시절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직도 쓸 말이 많지만
손목이 당겨온다.
앞으로도 쓸 수 있는 기회가 많을테니까,
.
.
물론 내가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무서워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기숙사에서 여자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반에서도 지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면
내 학창 시절은 조금 더 재미있었을 수도 있다.
추억도 더 많이 만들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늘 말하는 것처럼
처참한 학창시절은 아니었다.
친구가 있었고
자연이 있었으며
책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고민이 있었고
노력이 있었다.
우울도 있었고
불행도 있었고
성폭행도 있었고
폭력도 있었다.
불행하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다.
누구가를 미워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나 자신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
나의 추억을 찾자.
함부로 남에게 주지말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나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