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폭포들과 함께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
참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폭포,
동생 폭포,
친구 폭포.
폭포는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냥 자기가 생겨서 떨어지던 대로,
떨어질 뿐이다.
누가 지나간다고 물을 멈춰주지도 않고
그 물에 맞아 누가 죽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갖지도 않는다.
'좀 비켜!'
라고 소리쳐도 절대로 비키는 법은 없다.
애초에 그런 성질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콸콸콸 쏟아지는 폭포를 보면서
백날 천날,
'다르게 쏟아져라'
'비켜라'
'살살 좀 쏟아져라'
'따뜻한 물 좀 쏟아라'
라고 부르짖는다고 해서,
폭포가 그렇게 변할 리는 없다.
폭포는
자신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흐르던 대로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물이 맞기 싫다면
내가 폭포를 피해 가야 하고,
약한 물줄기를 원한다면
강한 폭포를 피해 약한 물줄기의 폭포를 찾아가야 한다.
따뜻한 물을 원하면 따뜻한 폭포를 찾아가는 것이 맞다.
자연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바꾼다면,
그건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훼손'시킨 것이다.
그 고유의 것을.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흐르던 대로 흐른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짧게는 십수년, 길게는 수십 년.
흐르던 대로 흐르던 사람을,
살던 대로 살던 사람을,
내가 원한다고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
'바꿔라'는 말은 마법 주문이 아니다.
상대방이 변하길 바라면서
울부짖고, 슬퍼하는 건
내가 참으로 자주 하는 일이지만
언제나 나 혼자만의 저주로 끝나는 일들이다.
고유의 흐름들을 살피고, 인정하자.
폭포의 흐름에 스트레스 받지 말자.
이런 폭포가 여깄네,
저런 폭포가 저깄네,
감상하고 이해하자.
물론 여기서 이해,
는 무조건적인 배려를 뜻하지는 않는다.
폭포가 나에게 피해를 준다면
나는 그 폭포를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폭포를 원망하거나,
폭포에 복수를 하거나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래봤자, 폭포는 내가 다시 다가가면
존재하던 방식 그대로
또 다시 내게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건,
폭포는 그저 자기가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했을 뿐,
나에게 피해를 줄 의도따위는 없었다는 것.
다른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생각하는 방식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나를 겨냥한 화살이기 이전에
그저 그 사람의 흐름일 뿐이라는 걸.
.
.
물론 모든 면에서 사람을 폭포와 같이 생각하지는 않아도 된다.
내가 자야하는데 동생이 시끄럽게 군다면
조용히 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씻어야 되는데 엄마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고 있다면
빨리 나와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너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니,
왜 내가 살판 났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라든지.
왜 엄마는 맨날 짜증만 내는 거야,
좀 다르게 생각해보라고.
등,
그 사람 고유의 행동 방식과 성격에 대한 것은,
폭포를 대할 때처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요구,
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살지 마라'
'그렇게 말하지 마라'
'그렇게 느끼지 마라'
생각하고, 살고, 말하고, 느끼는 건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습득해온 고유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그렇게'
를 부정한다는 건 그 사람을 부정한다는 것과 같다.
'그렇게'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답답해 하거나,
하는 감정들은 되도록 버리도록 하자.
그리고,
'그렇게'의 자리에
바라는 구체적인 것들을 넣을 수 있도록 하자.
'내가 살판 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징그럽다고, 그만 이야기하라는 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아프다.'
'내가 이제 와 고소를 하는 게 쓸데없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
.
그러면
폭포를 원망하느라고
폭포 옆을 떠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