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나는 생각만 하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주변 사람이 자기는 어학원을 다니겠다거나 해외 봉사를 가겠다거나
파워 포인트를 배워보겠다거나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말할 때.
저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뭔가를 하고 있는데,
나는 내 마음을 정리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멈추고 나만 들여다보고 있다.
이게 끝이 나는 일일까?
주변을 멈추고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나를 들여다 보는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조용히 변명을 해본다.
저 사람들과 나는 출발점이 달라.
인생의 시작점에서부터 상처를 입은 나는 그 상처를 짊어지고 가야 해.
이를테면 나는 전장에서의 부상병인 셈이야.
여기저기 심한 상처를 입었다구.
부상을 입지 않은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진군한다고,
나도 똑같이 진군하겠다고 하면 안 돼.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상황이 다른 거야.
다리에서 피가 철철 나고 상처는 곪아가고 있어.
부상병은 일단 퇴각한 후에 치료를 하는 법이야.
다리에 박힌 파편을 뽑고 소독을 하고 찢어진 곳을 꿰메고,
고름을 뽑아 내고 상처가 썩지 않도록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야 해.
그러지 않고 계속 진군만 한다면 언젠가는 낙오되거나 죽어버릴지도 몰라.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무리하게 다른 병사들과 보조를 맞춘답시고 따라가게 되면,
결과적으로,
다치지 않은 동료 병사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 거야.
아무래도 다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신경이 쓰일 뿐더러 돌봐줘야 할테니까.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게 되면 다른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져.
세균에 저항할 수 없고 그래서 병에 걸리게 돼. 그러면 죽어버리겠지.
또, 낙오 될 수도 있어. 도저히 행군을 따라갈 수가 없는 거야.
도중에 나 혼자서 낙오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죽어버리게 될 거야.
그러니까 부상병은 퇴각해서 상처를 치료하고 상처가 나을테까지 쉬어야 해.
이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전이니까.
또 다른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계속 해서 상처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고통스럽게 마련이다.
다른 일에 몰두하면 그 고통을 잊을 수가 있고, 그러다 보면 상처는 자연스럽게
치유가 될 것이다.
사실 나의 상처가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내가 그것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으며
치료한답시고 계속해서 상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활에 골몰해서 이것저것 하다보면 나아질 일이지
생각하고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설사 어떤 문제들은 해결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문제들은 평생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문제만 해결하다가는 결국 인생이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가는데로 일단 무언가를 해야한다.
둘다 맞는 말이다.
한 쪽이 조급함이라면 한 쪽은 소심함이다.
움, 일단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남들만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무언가를 하면 된다.
일단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그저 도피일 뿐이다.
그럼 무얼 할까?
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한 번 해보자.
하고 싶은 것 찾아서, 할까 말까, 해야될까 하지 말아야 될까 갈팡질팡 하느라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일단 이번 학기까지는 이 학교에 다닐 거니까 이번 학기까지만이라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보자.
제발 눈을 미래에 두고 걷지마. 넘어진다구. 밑에 맨홀뚜껑이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못 보잖아.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되잖아.
자꾸만
'심리학이 배우고 싶어. 대학에서 심리학을 배우고 대학원에 가서 정신분석학을 전공해야지.
그리고 나서 범죄 심리학에 대해서도 배우는 거야. 그렇게 해서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불안한 정신을 달래주고 범죄자들을 감화하는 일도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회과학
수업을 들으니까, '아놔, 나는 개인에 관심이 있는데 이렇게 거시적인 것을 배워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거잖아.
토론을 할 때도 '나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공감해. 그들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는 문제야.' 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찬성이나 반대 입장을 하나 선택해서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대는 능력을 배우지 못하게 되잖아.
자꾸만 나에게만 골몰하니까 주변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지.
무언가를 하자.
오늘은 '한나' 시사회에 간다.
가기 전에 교보 문고 들러서 다이어리 사야지.
그리고 고등학교 때처럼 다시 계획을 짜면서 살기 시작하자.
지금은 너무 그냥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어.
생각만 하면서 살고 그 사이에 별 일이 없으니까 어제 일이 방금 전 일같이 느껴지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이제 곧 있으면 시험이니까 시험 공부도 좀 하고.
5월달에 친구들이랑 캠핑 갈 계획도 좀 짜고
외국어 공부도 하고, 국토대장정도 가고, 동생 공부도 좀 가르치고.
대략 한 달 동안을 생각의 늪에 빠져 살았네.
이제 그만 빠져 나올 때도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