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가 왔는데도 외롭다.
자꾸만 누군가가 그립고, 같이 있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
상상의 대상을 하나 만들어 그 사람과 연인이 되어 사랑 받는 공상을 한다.
실제로는 관심이 없다.
단지 그런 공상을 할 뿐이다.
사랑받는 생각.
늘 외롭다.
늘 핸드폰이 손에 쥐어져 있고,
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단지 상상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만족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만족은 순간의 만족일 뿐,
금새 증발되어버려 또 다시 나는 상상 속에서 사랑을 충전한다.
-
누군가 나를 아껴준다는 느낌.
누군가 나를 소중히 여겨준다는 느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
나는 느낄 수가 없다.
실제로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는 건지
아니면 주변에 있는데도 내가 그 감정을 느낄 수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런 느낌을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외롭다.
이 세상에서 나를 조건없이 감싸 안아 주는 것은 태양밖에 없다는,
신파적인 생각마저 든다.
태양빛을 받고 있으면 온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그 느낌에
엄마의 품에 안긴 기분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엄마의 품에 안겨 본 것은 7살 때.
엄마에게 안기고 싶어서,
엄마가 내가 거실에서 잠들면 안아서 방으로 옮긴다는 것을 알고 자는 척을 했다.
엄마의 따스함이 기억난다.
뭉클했던 엄마의 가슴.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
누군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고
안아줬으면 좋겠고
내가 없으면 안될 것 같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나 혼자 강가에 서 있는 기분이다.
외롭다.
-
왜 외로울까?
항상 나는 이 외로움을 밖에서 채우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외로운 것은 가족에게서 사랑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빠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랑한다면서 매일같이 때렸기 때문이다.
설령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엄마의 사랑은 받고 싶지만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서 사랑받는다.
내게 언제나 사랑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존재다.
-
내 인간관계의 문제점을 찾으려고 애를 써왔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과거를 돌아보고 치유하고 그것을 다시 내 인간관계에 반영해왔다.
성과는 컸다.
분명 더 좋아졌고 더 나아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는다.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쭈뼛대는.
이제는 가족이라는 그 관계 속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
내 모든 인간관계의 원형은 가족이다.
가족간의 관계로부터 유추하여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상호작용의 원형,
나와 엄마의 관계, 나와 아빠의 관계, 나와 동생의 관계.
이 관계로부터 말미암아 인간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깥의 관계를 아무리 바꾸고 개선시키려 해봤자, 가족과의 관계가 그대로라면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다른 사람의 짜증을 흘려듣지 못하고 반박하고야 마는 행동은 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우리 엄마는 참 별 것 아닌 일에 짜증을 많이 내기 때문에 나는 짧은 인생동안 항상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렇다. 사장님이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나에게
화를 내면 나는 그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같이 반박을 하고야 만다.
다른 사람은 그냥 흘려들어야 니가 편하다고 조언하지만, 나는 누가 나에게 부당하게 짜증을 내면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이 습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사장님에게도 공격적인 태도로 나가기 일쑤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 그것을 경명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은 아버지와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빠는 겉과 속이 다르다. 거짓말도 자유자재다. 겉과 속도 다르고, 행동과 말도
다르고, 집 밖에서와 집 안에서의 행동도 다르고, 엄마와 나, 아빠 이렇게 셋이 있을 때와 나와 둘이 있을 때의 행동도 다르다. 언제나 다르다. 이중적이다 못해 다중적이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과 언행불일치, 이중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을 참지 못한다. 경멸이 가슴 속을
잠식한다.
마찬가지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는 것도 경멸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두리뭉실하게 나에게 이야기하거나 약속을 하곤,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용해 약속을 어기곤 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명확히 약속사항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싫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에 있어서 이것은 굉장한 스트레스다. 고용주들은 흔히 처음에 급여나 시간이나 업무 내용을 명확히 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때 그때 상황을 봐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하기 위해서다. 일 하는 거 봐서, 장사 되는 거 봐서, 그 때 그 때 봐서.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이 싫다. 처음부터 명확한 것이 좋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전화해서 괜시리 인사치레 하는 것을 싫어했다. 용건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데, 그동안 연락도 안 하다가 용건이 생겨서 연락을 해놓곤 용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잘 지냈냐느니, 뭐하냐느니 물어보면 짜증이 난다. 그래서 바로 '왜 전화하셨는데요?'라고 물어보곤 했다. 뭐, 이 문제는 그 정도쯤이야 사교생활의 일부라고 넘길 수 있게 되었지만.
또 내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 하지 않는 것도 나와 부모님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버지는 항상 나의 행동이나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야,' 부터 깔고 들어왔다. 나와는 다른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설교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나는 거부감부터 들었다. 너무 어린 나에게 너무나 현실적인 세상의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아예 꿈을 키울 싹을 잘라버렸달까. 내가 뭔가가 하고 싶다고 하면 그건 힘든 일이다, 뭐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의미없는 일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는 내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가 토를 달지 않을 선까지만, 훈계하지 않을 선까지만 이야기한다. 엄마는 세상 일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 건지만 신경쓴다. 뭐, 뭐라고 하지는 않으니 아버지보다 훨씬 이야기하기가 편하지만, 어쨌든 진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엄마와 나는 사는 세상이 다른 느낌이다. 동생에게는 그나마 편하지만, 나보다 어리고 그 아이도 엄마와 아빠 못지 않게 현실적이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한숨을 쉰다.
결국 나는 가족 중에 나의 속마음을 편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일기장에라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아빠는 컴퓨터와 보안 쪽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해킹 프로그램도 다운 받아서 가지고 논다. 집 컴퓨터 가지고도 그렇게 하고, 나와 내 동생이 쓴 글, 들어간 홈페이지 모두를 검사한다. 어디를 들어갔는지, 어떤 글을 썼는지까지 남김없이 읽는다. 심지어 컴퓨터에 저장된 어떤 파일을 열어보았는지까지도 안다. 그리고 내가 집 컴퓨터에서 접속한 적이 있는 아이디를 해킹해서 내가 내 카페에 올려놓은 내 일기를 읽기까지 한다. 나는 항상 누군가가 내 일기나 내 개인적인 기록을 엿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나는 내 일기장에도 내 이야기를 속시원히 하지 못한다. 누군가 볼 것만 같다는 그런 강박관념도 있고, 내 동생과 방을 같이 쓰기 때문에 언제라도 몰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같은 델 와서 몰래 쓰거나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근래에 들어서는 울트라 다이어리를 알게 되어서 이렇게 내 속마음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어서, 그나마 속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집에서는 절대로 울트라 다이어리에 접속하지 않는다. 아빠에게 해킹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과 같이 익명성을 보장받는 곳에서만 접속한다. 하지만 나는 항상 불안하다.
내 IP가 추적당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다른 사람의 감정이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나는. 그런 감정의 파동이 불편하다.
여자라서 태생적으로 공감능력이 발달된 데다, 개인적으로도 상상력과 공감력이 발달된 편이다.
그런데 집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화남, 슬픔, 연민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늘상 싸웠다. 늘.
그러면 나는 엄마의 억울함과 슬픔, 아빠의 답답함과 비참함, 동생이 느낄 스트레스를 혼자 다 느껴왔다.
다른 사람은 그런 걸 신경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엄마가 불쌍했고, 아버지는 경멸함과 동시에 연민했고, 동생은 걱정했다. 한 번 부부싸움이 일어나면 나는 네 사람의 감정을 짊어져야 했다. 죄책감이라는 나의 감정과 함께.
결국 나는 외면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전혀.
엄마의 억울함도 아빠의 답답함도 동생의 스트레스도 내 문제가 아니라며 내 가슴 속에서 밀어냈다.
나의 죄책감도 잊어버리려 애썼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나에게 들어와 내 감정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런 습성이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누군가 나에게 지나치게 다가오면, 지나치게 나와 감정적으로 교류하려 하면 나는 셔터를 내린다.
다가오지마.
내 감정 속에 너의 감정을 섞어놓지마.
그건 네 거야.
길을 가다 우연히 친구를 만나면, 먼저 간단한 인사를 한다.
대화가 시작되면 상대방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이야기한다.
'잘가'
상대방의 말을 툭툭 자른다.
감정적 교류가 발생하지 않게.
내 감정 속에 들어오지 않게,
나의 평안한 상태를,
그 어떤 오염도 되지 않고 단조로운 나의 감정적 상태를 흐트러트리지 않도록.
경계하고 방어한다.
-
가족관계에 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접한 인간관계.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자신만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외부의 대인관계에 적용시키는 노력에 앞서
가족 간의 관계를 돌아보고 바꿔보려 한다.
엄마와의 관계, 아빠와의 관계, 동생과의 관계.
그러면 뭔가 해법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