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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책   deux.
조회: 2775 , 2012-02-16 15:11


좋은 책을 빌렸다.
아랍 단편소설전.
늘 서구 문학이나 일본, 한국 문학만 읽었다.
그런데 아랍이라니,
생소하고 신기했다.
그래서 빌려봤다.

읽기에 앞서 한 번 쭉 훑어보던 중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살까?'

'아, 그런데 책을 사는 건 좀 그런데.'


.
.

나는 책을 잘 사지 않는다.
정말 메모를 많이 하면서 읽고 싶은 책이나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 아니면
좀처럼 사서 읽지 않는다.
다 그냥 빌려서 읽는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살까?'하는 마음이 드는 책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고민에 빠진다.

'조금 읽어보고 살까?'


'아니야. 조금 읽어보고 사면 그 전에 빌려서 읽은 부분은 메모를 못 하는데.'


.
,

그러면서 빌려 읽지도 사지도 못한 채
그 책은 두고 오고 만다.

이 역시
일기를 잘 쓰지 못하는 것,
언어 공부를 잘 시작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뭐랄까,
나는 내 인생을 지나치게 '규정'하려 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원칙을 정해서
그 아래에서 행동하려 한다.

'나는 책을 사서 읽지 않는다.'
뭐 이런 원칙이랄까.
엄격한 원칙까지는 아니지만
어디 자서전 같은 데서 읽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서전이나
휴먼 다큐 같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라고 생각한다.

굳이 그와 똑같은 종류가 아니더라도
어디 가서 '나는 이래요.'라고 말 할 수 있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살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래도 보고 저래도 보다가 결국은 좋은 것이 남아
'그런' 삶의 방식이 되는 것인데,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해서 '그렇게'만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누군가의 정갈한 자서전처럼 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자꾸만
일기를 예쁘게 써서 정리하려 하는 것이고
언어 공부를 제대로 하기 전에는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며
책을 사지 못하는 것이다.


.
.


이것은 답답하다.
답답해서 얼른 벗어버리고 싶다.

그런 삶의 모습 따위는 없이 살면 된다.


'하고 싶으면 바로 하면 된다.'
사고 싶으면 사고
별로 사고 싶지 않으면 안 사면 된다.
고려할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살 필요가 있는 건지
내가 지금 살 수 있는 돈지 있는 건지,
그것만 고려하면 된다.

만약 사서 읽지 않게 되면
다시 팔거나 
누굴 주거나
기부를 하면 그만이다.
그러다가 책을 사고 싶어지면
계속 사면 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책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책을 사기 싫어지면
책을 안 사면 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책을 안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책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책을 안 사는 사람이다.'
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

사는 것은 자서전이 아니다.
자서전은 다 살아보고 나서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정일랑 홀랑 날려버리고 결과만을 말하는
그런 자서전을 동경하지 말고
당장을 살자.



.
.

그럼 이제 자서전 장막을 치워볼까♪

오늘 빌려온 책 중에서는 별로 소장하고 싶은 책이 없다.
그냥 읽고 돌려줘야겠다.



bingola33   12.02.16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상하게 책을사서 읽으면 재미가떨어지거나 지루해져서 덮어보게되고 빌려서 읽으면 왠지 반납해야된다는 압박감에 억지로라도 읽게되는건 저만그런건가요?

Praeterita   12.02.16

저도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빌렸는데 끝까지 읽어보자 하는 식으로요..

李하나   12.02.17

ㅎㅎ저는 그 반대예요. 산 책은 내 돈을 주고 샀으니 아까워서라도 다 읽게 되고, 빌린 책은 뭐 그냥 다시 갖다 주면 되니 되려 잔뜩 빌려 놓고 다 읽지도 않고 반납하기 일쑤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