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하다.
많은 아이들이 바닷속으로 가라 앉았다.
어느 순간에는 소름이 끼치면서 침통하다가도,
가끔은 현실로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다로 가라 앉았을까-
멀리서 일어난 일,
지금도 집 밖에 나가면
따뜻한 공기와 산들거리는 바람, 꽃향기,
그리고 고요함이 나를 맞아주는데,
어딘가 먼 곳에서는
배가 바다에 거꾸로 쳐박힌 채,
사람들을 가둬놓고 도무지 토해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믿기가 힘들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다로 가라 앉았고,
오늘까지도 나오지 못했다.
실제로 수 백 명이 죽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삶에 대해 가르쳐주는 책을 열심히 읽는다.
좋은 문구를 공책에 옮겨 적기도 하면서-
틈틈이 핸드폰으로 사고 관련 소식을 확인하면서.
내가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생명을 잃은 것은 아니긴 하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힘든 일을 겪은 것은 맞지만,
어쨌든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다행히 나는 잘 견뎌내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쾌적한 방에 앉아
내 노트북으로 이 일기를 적고 있다.
현재만 놓고 보자면 그 사람들에 비해 내가 얼마나 편안한가.
조금 전 법무법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 쪽에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는.
법원에 10번이 넘도록 반성문을 제출하면서
피해자 쪽에는 접촉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지난 재판에서 했고,
이에 편지를 보낸 것 같다.
조금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지나간 날들, 그리고 내게 앞으로 펼쳐진 날들을 생각하면
꽤나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바닷 속에 가라 앉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보내야만 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내 일쯤은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
요즘은 하루하루에 집중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물론 공상이다.
나는 공상을 아주 자주 한다.
그 때 그 때마다 다르지만,
요즘은 좋아하는 연예인이 생겨서 그 연예인이 나오는 공상도 자주 하고,
세월호 사고 관련된 공상도 많이 한다.
잠이 좀 깰 때까지 공상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신다.
커튼을 열고, 사과를 잘라 먹는다.
별 생각 없이.
나는 이 때까지 내가 별 생각이 없다는 게 요즘 정말 마음에 든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지 대충 생각해본다.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을 먹고
산책을 다녀온 뒤,
씻고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공부를 하거나 미드를 보다가
저녁을 먹고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나간다.
운동을 다녀오면 남은 저녁 시간은
하고 싶은 걸 하거나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보낸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일어나자마자 친구와 나누는 인사나 잠깐의 대화,
그리고 저녁에 친구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는 대화.
그리고 친구네 가족들과 잠깐잠깐씩 하는 인사나 이야기.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
공부, 운동은 안 한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꼭 해야 한다.
이게 내가 나 자신의 하루를 가꾸면서 깨달은 점이다.
사람과 함께 있기.
그래야 영혼이 찬다.
영혼이 차야,
나쁜 과거나 기억, 두려움, 불안, 자기연민 같은 것들이 깃들 자리가 없다.
대개 나의 편안함을 방해하는 이런 감정들은,
영혼의 빈 공간을 채우며 들어온다.
그러니까 내가 하루의 시작인 아침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영혼을 채우는 일이다.
빈 공간이 남지 않도록.
정오가 지나기 전까지 이렇게 영혼만 잘 채워두면
나머지 하루는 잘 지낼 수 있다.
특별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영혼을 채우는 일에는 오전의 산책도 한 몫 한다.
요즘 산과 들이 정말 예쁘다.
색색의 꽃들도 많이 피어있고,
꽃향기도 좋다.
벌들이나 벌레들도 아주 많다.
나무에 잎새가 다 나와서 산도 아주 풍성해졌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몸을 움직이고 나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영혼을 채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채워진 공간들의 조직을 듬성듬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람이 자유롭게 들고날 수 있도록.
커다란 공간을 만들지는 않되,
조직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생각도 부드러워지고
마음 속에 막히는 부분도 없다.
산책으로 이렇게까지 해두고 나면,
온 몸에게 인사하는 느낌으로 목욕을 한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한다.
좋아하는 노래를 골라 가사를 외우기도 하고,
그 가사를 공책에 받아 적기도 한다.
어린 왕자 원서를 읽기도 하고,
미드 house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 준비를 하고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나간다.
운동을 하면서도 역시 공상을 많이 한다.
공원에 처음 갔을 때는 공상을 안 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니까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나쁜 공상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거나
화내는 상황을 연출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저 그런 공상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가벼운 생각들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래, 그렇게 하고 싶은 거지?
그러면 지금은 공상으로 만족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그렇게 해보자.'
.
.
이번주 금요일에 변호사님을 만나 민사소송에 관련된 것까지
모두 마무리할 생각이다.
법정에서 진술도 마쳤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해간다.
재판이 몇 번 남기는 했지만,
그건 이제 재판부와 아버지의 문제이다.
굳이 결과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민사 소송은,
아마 승소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원래 위자료를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 피해일자로부터 3년이 지나 소멸시효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변호사님이 아주 아까워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작년 12월에 만료되었다고.
사실 민사 소송으로 받을 위자료에 기대가 많았다.
최소 3천 만원에서 최대 5천 만원까지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빌렸던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아버리고,
친구네 집에서 나갔을 때 집을 구할 보증금도 마련하고,
동생 앞으로 예금 통장도 하나 만들어주고,
내 앞으로도 좀 떼놓고.
나머지로는 사실 여행을 하고 싶었다.
실컷.
대출이나, 보증금이나
어차피 다 내가 벌어서 살 각오를 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별 상관 없었는데,
여행을 하지 못하게 된 게 내심 아쉬웠다.
사실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기대하고 계획하면서도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했었는데
정말 이렇게 될 줄이야.
어쨌든 여행은 포기해야 할 부분이다.
돈이 생긴다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라서
좀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붓기를 빼야겠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돈이었다.
그래도 민사소송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소멸시효라는 게 필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14년 동안이나 친아버지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고도
위자료를 한 푼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다.
변호사님도,
가해자가 친부여서 고소를 결정하기 힘들었다는 점을
피력해볼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긴 하셨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승소할 수는 없더라도,
내 사건으로 담당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한 번이라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소송 자체는 제기할 수 있다고 하니까,
이번 기회에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두고 넘어가고 싶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
.
이제 다음 주면 이런 한가롭고 편안한 일상도 잠시 끝이다.
다음 달 말에 공연이 두 개나 있어서,
연습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기 때문이다.
벌써 생각해도,
굉장히 피곤한 날들이 될 것 같다.
한 달의 반을 연습을 해야 하니.
과연 바쁜 생활 안에서 나의 마음은 어떻게 균형을 잡을까.
지금처럼 평안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바빠지는 거니까.
다음 주에 이 글을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