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온지도 어언 반 년이다.
지난 12월 중순에 나왔으니.
엄마와는 그동안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일요일에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잘 지내냐고,
어디 있냐고.
통화 좀 하자고.
전화를 받지 않았고,
카톡 답장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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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 다시 전화가 걸려 왔고,
전화를 받았다.
아주 어색할 줄 알았는데,
엄마라서 그런 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떨어져 있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화요일에 만나기로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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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저녁에 만나서 같이 밥을 먹었다.
엄마는 날 보더니 손을 잡으면서
'오랜만이야'라고 말했다.
아주 살가운 목소리로.
나도 싫지 않았다.
돈까스 집에 들어가서 회덮밥을 시켜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니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그런데 내가 대학 다닐 때 손 한 번 안 벌린 거 생각하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역시 싫지 않았다.
내 신발을 보더니 신발이 이게 뭐냐면서
신발 가게에 가서 예쁜 샌들도 사줬다.
내가 보기엔 멀쩡한 운동화인데
동생도 엄마도 보기만 하면 신지 말라고 뭐라고 한다.
아무튼 요즘 신발을 못 사고 있었는데
신발이 생겨서 좋았다.
용돈도 10만 원 받았다.
엄마도 돈 없는 거 아는데,
미안하다며 주는 거라 못 이기는 척 받았다.
사실 돈이 좀 필요하기도 했고.
그러고 나서 집에 들어와서 자고 가라길래,
짐이 다 밖에 있어서 불편하다며 핑계를 댔다.
이렇게 바로 들어가는 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카페에 가서 얘기를 하자고 해서
카페에 데리고 갔다.
카페에 앉아서 사진도 보고,
이런 저런 얘기도 더 했다.
신발도 신어보고.
오랜만에 엄마랑 만나서 얘기를 하니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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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엄마가 나한테 사과해주고
다시 만나게 된 게 기분이 참 좋다.
참 묘한 일이기는 하다.
집을 나올 때는 그렇게 미웠는데-
가족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 같았으면 머리로 막아보려 했을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성폭행 당할 때 구해주지도 못 했고,
고소할 때도 도와주지 않았던 사람이다.
좋아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이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그걸 잊지는 않았다.
엄마가 분명 잘못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좋은 것 역시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모순되는 감정을
어느 쪽도 싫어하지 않고 그냥 느끼기로 했다.
실제로 느껴지는 감정인 걸,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그리고 그닥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기로 했다.
딸이 엄마를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쁠까.
엄마와 가깝게 지내고 싶고
엄마가 따뜻하게 대해주면 기분 좋은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나도 엄마랑 다시 잘 지내고 싶다.
다시 집에도 들어가고 싶고
동생이랑 할머니랑 넷이 다시 놀러도 가고 싶다.
이런 일상들이 그립다.
친구 집에서 편하게 대해주시기는 하지만
내 가족은 아니다.
친구의 가족일 뿐이다.
수 십년 동안의 유대를 내가 어떻게 몇 달 만에 가질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나는 바깥 사람이다.
나한테 다들 잘 해주신다.
아무도 짜증을 내지도 않고 혼내지도 않는다.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이걸 잘 해주는 거라고 느끼고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냉철하게 본다면
이건 내가 주변인이라는 것이다.
친구에게는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혼도 내는 건,
가족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잘해주기만 하는 것은,
내가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싫다는 게 아니다.
나에게 이 정도로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다만,
이제는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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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분명 풀어야 할 마음이 있다.
어떻게 시작한 일인데,
여기서 흐지부지 되면
언제 또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아빠가 나를 성폭행 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알면서도 왜 신고를 하거나 알리지 않았는지,
나를 왜 계속 집에 두었는지-
이걸 묻고 싶다.
묻고 풀고 싶다.
그래야 다시 엄마를 편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저런 의심들이 그 사랑을 가린다.
가리고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고 싶고,
그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제 와서 엄마에게 책임을 물으라거나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쩄든 모든 일은 아빠가 저지른 일이다.
엄마가 조금만 더 잘 대처했다면,
내가 덜 고통을 받긴 했을 것이다.
내가 성추행 당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했다면
나는 강간까지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지나간 일이다.
나는 그 모든 일을 겪었고,
이제 아빠는 그에 대한 죗값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죄에 합당한 만큼의 형을 살고 나올 것이다.
엄마는 그 안에서 어른으로서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왜 그랬는 지 그 이유라도 듣고 싶다.
뭘 했는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듣고 싶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왜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시했는지.
엄마는 아빠가 밤에 내 방에 들어오는 걸 수없이 많이 봤다.
하지만 지금 물어보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건지도 궁금하다.
엄마가 보는 앞에서 내 가슴을 만지는 행동을 하는 것,
그건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심각한 일이지만,
잊으려고 했겠지.
아빠가 낮에 집에 온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걸 알았어야 했다.
아빠가 나를 성추행한다는 걸 알았다면
나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물어봤어야 한다.
아빠가 요즘은 그런 짓 안 하는지-
물어보고 물어봤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분명 엄마의 잘못도 있다.
무관심 했던 것이다.
엄마가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더라면-
엄마가 나의 편이라는 확신을 내게 주었더라면.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약속했더라면
어린 나는 엄마에게 털어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엄마는 내 보호막이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의 말 한마디에 나가 떨어질 약한 방패였고,
아빠의 주먹 한 방에 깨어져 버릴 갑옷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먹은 나를 죽일 것이었다.
이게 그 때 내가 느낀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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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모두 지난 일임은 맞다.
그래서 엄마는 그저 잊고 싶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 묻고 그냥 살고 싶겠지.
나도 그래볼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아빠가 죗값을 치렀으면 됐지,
엄마까지 힘들게 할 게 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엄마를 한 번 보고 와서 흔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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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그냥 넘어가자,
하는 나의 생각이 나를 계속 그 집에 묶어 놨었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되는데,
그러면 모두가 행복한데.
내가 굳이 터뜨려서 모두를 고통받게 해야 하는 걸까,
정확히 이 생각이
내가 엄마에게도
경찰에게도
아빠에게 당하는 일을 털어놓지 못하게 하는 죄책감이었다.
엄마에게서 남편을 빼앗고
동생에게서 아빠를 빼앗고
아빠에게서 가정을 빼앗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냥 내가 희생하고 말았던-
내가 감당하고 참고 말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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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똑같은 실수를 또 되풀이 하는 것 아닐까.
엄마와 묵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나의 생각이
지나친 이기심과 집착일까?
이 정도 했으면 그냥 나머지는 묻고 살면 되는 걸까?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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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따뜻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이 유혹을 참아야만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