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버전
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李하나
 내가 나보다 아끼는 친구에게   cinq.
조회: 1937 , 2015-07-05 22:35


오늘은 간만에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었다.
스트레스라고 할 것도 없는데
그동안 너무 평온한 상태여서,
오래간만에 고민을 했었다.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닌데
또 나에 대한 고민으로 괴로워하다가,
나 자신을 위로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다면 이 고민이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의 고민이라고 생각해보고
대답해보기로 했다.

나 자신이 그렇게 용서가 안 된다면, 
나에게 관대해지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면, 
내가 가장 쉬워하는 게 남에게 공감하는 거니까
남을 위로하는 거니까

내가 지금 하는 고민,
있었던 일, 
느끼는 감정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보고 반응해보기로 했다.





.
.



하나에게.

안녕, 하나야. 나는 너의 가장 친한 친구 송자야.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노트북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는 오빠에게 전화가 왔어.
자기 여자친구한테 누가 야동을 보냈다는 거야.
내가 그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그래서?' 였어.
이 얘기를 갑자기 전화해서 왜 나한테 하는 걸까? 
누가 무엇을 하다가 무엇을 보냈다는 걸까? 

그래서 여자친구는 지금 어떠냐고 하니까
'화가 났다'고 대답했어.
자신도 화가 났다고.

나는 조금 황당했어.
나에게 왜 이 얘기를 하는 걸까? 
그리고 언니가 '화가 난' 상태고, 자신도 화가 난 상태인데
나한테 전화해서 뭘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이야기하는 걸까? 

그래서 나는 일단 언니가 지금 그걸 어떻게 느끼는 지 들어보라고,
나도 좀 황당한 상태라고 얘기했고,
오빠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끊었어.

나는 전화를 끊고도 조금 의아했어.
뭔가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나한테 얘기한 건가?

근데 친구가 카톡으로 야동을 보낸 게,
어떤 맥락에서 나한테 말 할 일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를 못 했었어.

그러고 있는데 룸메 언니가 나한테 말했어.
그 오빠가 자기한테 전화를 해서, 또 물어봤다고.
그 여자친구 언니가 룸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세한 자초지종을 얘기했어.

듣고보니,
뜬금없이 그 언니에게 수위가 높은 성인 동영상을 보냈고
그 동안에도 수없이 성희롱적인 발언을 해왔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던 거였어.

언니는 이거에 충격을 받았고,
경찰에 신고할까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지.

이제야 이해가 갔어.
평소에 야한 이야기도 잘 하고 섹스에 굉장히 개방적이었던 언니지만
친구가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야동을 보냈던 거야.
그리고 왜 이런 걸 보냈냐고 하니까,
'좋잖아'라고 대답했고,
자긴 이러는 거 싫다고 하니까,
'야동 대마왕이 왜 이러시나'라는 식으로 대답했다는 거야.

아무튼 그래서 룸메 언니가 잘 상담을 해줘서
그 언니는 성폭력 상담소에 전화를 해보기로 했어.

잘 해결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아까 전화로 했던 반응 때문에 그 오빠가
'얜 뭐야, 별 일 아니라는 반응이네. 얘는 안 되겠다. 다른 사람한테 전화해봐야지.
쓸모가 없네.'라고 생각하고,
룸메 언니에게 전화한 건 아닐까.

'성폭력에 관심 많은 것 같아서 전화했는데, 도움이 안 되잖아?'
'감수성이 없어. 왜 이렇게 생각이 얕아?'
'앞으로 얘한테는 뭐 상담하면 안 되겠다.'

등등의 생각을 했을까봐 겁이 났어.

그리고 내가 다시 연락을 안 해서,

'얜 진짜 무관심하다'
'성폭력 상담사 할 자격이 없어'

라고 생각할까봐 지금도 계속 걱정이 되.
나는 정말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걸까? 
상담사를, 반성폭력 운동을 할 자격이 없는 걸까? 

내가 너무 큰 일을 겪어서, 
그래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둔감해진 것 같아.
나는 내가 성폭행을 겪은 게,
정말 이 일을 하는 데 좋은 점으로 작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약점도 있었어.

나보다 약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잘 와닿지 않는 거야.
야동을 보여준 게 뭐 어때서? 
짜증나긴 하지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은 아니잖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거지.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가해자들의 논리와 똑같잖아.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
물론 힘들거야, 그런데 다 지나가.
다 해결할 수 있어. 라고.

물론 이미 같은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조금 더 초연할 순 있지만
이렇게까지 무관심한 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끔 할 수 있어서
되게 위험한 것 같아.

아무튼 이런 저런 생각으로 우울했어.
그래서 저녁을 안 먹긴 했지만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방금 라면을 끓여서 먹고 밥까지 말아먹었어.

한동안 스트레스 받아서 먹은 적 전혀 없었는데.

어쨌든,
그 오빠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난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일까? 
무관심하고, 이기적이고.
그런 사람일까?



.
.


송자에게

안녕, 송자야. 난 너의 가장 친한 친구 하나야.
오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 여자친구라는 언니가 충격은 받았겠지만,
친구였던 데다가 카톡으로 야동을 하나 보낸 거라서
괜히 호들갑 떠는 게 더 이상한 걸 수도 있어.

물론 언니도 화가 났고,
상대방이 전에도 여러 번 그런 적이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긴 해.
이건 분명 성폭력이니까.

하지만 너까지 나서서 호들갑 떨 일은 아니야. 
긴급한 상황도 아니고-
너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니잖아? 

문제인 상황은 맞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네가 너무 책임감 느끼지 않아도 되.

그 오빠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네가 평소에 성폭력에 관심이 많다는 게 생각이 나서
너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을 거야.

그런데 얘기하다 보니까,
네가 잘 이해를 못 하고,
너에게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니라
좀 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야.

너는 그냥 친구잖아.
그 오빠 성격 상 이런 일을 누구한테 단순히 하소연 하려고 전화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해결책을 바라고 전화하는 거니까.
조금 더 이 일과 가까운 사람에게 전화를 건 거야.
네 룸메 언니가 상담소에서 일을 하니까.

네가 쓸모가 없거나
도움이 안 된다거나 그런 생각으로 
'에잇 뭐야'하고 전화를 끊은 게 아닐 거야.

너에게 상담하기에는 네가 그냥 학생이니까,
맞지 않다고 생각한 거겠지.
아차 싶었을 수도 있고,
미안해했을 수도 있어.

전화해서 다른 말도 없이 갑자기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한 거니까.
어쨌든 그 오빠가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아닌 거 알잖아.
평소에 너를 되게 좋게 봤고,
너랑 같이 일 하고 싶다고 얘기도 많이 했었고.

사실 이런 일을 갑자기 너한테 얘기할 것도 아닌데
평소에 친분이 있고 자주 고민 상담을 해왔던 터라
너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을 거야.

하지만 확실히 너한테 뭘 바랄 수 없는 건 맞지.
네가 전문가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물론 그 오빠가 너를 참 좋게 봐서 네가 더 부담이 될 것 같긴 해.
너에게 실망했을까봐.
근데 또 그럼 좀 어때.
그 오빠가 너한테 실망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아는 너는 정말 괜찮은 아이야.
내가 늘 얘기하잖아?
난 정말 너를 믿고, 사랑한다고.
송자야,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일상적인 성폭력에 무뎌진 것도 당연해.
그렇게 큰 일이 있었고 그걸 극복해냈으니,
다른 일들이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냥 당연한 거야.

같은 자리를 매일 맞다보면 굳은 살이 생겨서 안 아픈 법이고,
똑같은 냄새를 계속 맡다 보면 나중엔 냄새가 안 나는 법이야.
그건 그냥 원래 그런 거야.

다만 네가 그걸 알아챘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아, 지금 내가 너무 익숙혀져서 무뎌졌구나-
그걸 알았으면 이제 거기에 다시 민감해질 수 있도록 너 자신을 가다듬으면 되.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민감할 수 있게,
그들의 고통도 공감할 수 있도록.
꼭 무슨 친족성폭력이나 집단 강간 같은 긴급하고 잔혹한 일만
성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감수성을 가다듬으면 되는 거야.

가해자 논리와 겉은 닮아 있지만 그렇다고 속이 같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마.
아예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별 일 아니라고 일축하는 것하고
그 고통과 괴로움, 절망, 모든 것을 겪은 후에
다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니더라,
하는 건 차원이 달라.

누구든지 그렇게 된다구.
다만 네가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일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 감수성을 가다듬어야 하는 것 뿐이야.


너는 무관심한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도 절대 아니야.
그렇게 전화를 끊은 건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상대가 뭔가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너한테 전화를 해서 대화가 잘 이어지지가 않은 거야.

뭘 물어봐도 단답으로만 대답했다며.
전화를 했으면 이러저러 해서, 이런 걸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다,
이렇게 해야 네가 이야기하기가 쉽지
그냥 갑자기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만 툭 얘기하고,
그 뒤로 아무 얘기도 안 하면
네가 전문 상담가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능숙하게 뒷이야기를 끌어내겠어.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는 마.
그 오빠도 그렇게 생각 할 거야.

하나는 정말 좋은 애야.
그래서 전화를 걸었는데, 하나보다는 상담소에서 일하는 친구가 더 잘 알 것 같아.
일단은 이걸 해결하는 게 중요하니까,
그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보자.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야.
우리 송자,
또 자괴감이 드는구나?

그럴 수 있어.
나라도 그랬을 거야.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럴 필요 없다는 거.

내일 그 오빠 만난댔지?
만나서 해줄 수 있는 얘기 해주고 그래.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이 일 그렇게 심각한 일 아니고
네가 뭔가를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야.

상대가 너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고,
적절하지 못한 방식이었어서 네가 응답을 제대로 못 했고,
너 또한 완전히 전문가의 입장이 아니라서 당황했던 거지,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이기적인 게 아니니까,
그 오빠도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닐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오빠 너 좋아하잖아,
너랑 잘 맞는다고 맨날 그러고 같이 일 하고 싶어하고.
가끔은 왜 자꾸 너한테 전화하나 싶을 때도 있다니까?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너한테 대시하는 건 아닐 텐데,
뭐 시험 기간에는 레포트 좀 읽어달라고 전화하고,
밤에 네가 혼자 시험 공부하고 있으면 자기 시간 붕 떴으니까
같이 얘기 좀 하자고 전화하고,
연애 상담 하고,
계속 자기 하는 알바 자리에 같이 하자고 부르고,
그런 걸 보면,
적어도 친구로서 너를 엄청 좋아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자꾸 뭘 물어보고 같이 하고 싶어하는 거지.
어떤 점에서 그런 지 너는 모르겠다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알 것 같은데?

네가 가진 장점이 있으니까.
그게 좋아보이는 건 당연하니까.
나부터도 너랑 친해지고 싶었는 걸.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겠지?:-)
사랑하는 친구야, 
내가 옆에 있잖아.
누가 너를 싫어할 까봐 걱정이 되면 나를 생각해.
나는 절대 너를 싫어하지 않아.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믿어.
설령 너의 어떤 행동이나 말투, 단점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너라는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정말로 없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너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해,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