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는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왠지 안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생각해봤다.
먼저 시험 점수를 맞추지 못 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조금 있는 듯 했다.
사실 영어를 좋아하긴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시험 점수를 얻는 것은 다르다.
시험을 못 보는 편은 아니지만,
막연히 '잘 봐야 해'라는 목표가 있을 때와
반드시 맞춰야만 하는 최소 기준이 있을 때와는 부담감이 다르다.
하지만 못지 않게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그동안 내가 계속 외국을 나가고 싶어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는 외국과 외국인이 더 지내기 편했기 때문이다.
외국에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낼 수 있었고
외국인과 함께 있을 때면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나 자기 검열, 같은 것이 없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고
느낀 대로 행동했다.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리적 특성상 그랬던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는 조금 편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회에 '속'해 있지 않으니까.
마치 우리가 직장에서보다 지하철에서 조금 더 편한 것처럼.
내게 외국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시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나 자신의 과거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
.
그런데 요즘은 한국에 있는 것도 아주 편하고,
주변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좋아지면서
이 곳을 떠나는 게 아까워졌다.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이제 막 친해진 사람도 있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싶고,
하는 생각이 든달까.
1년 동안 외국에 있다가 돌아오면,
아마 조금씩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내 주변이 또 새로운 사람들로 바뀔 것이고,
조금 더 관계가 헐거워져 있겠지.
물론 중요한 관계들은 그대로 있을 테지만.
어쨌든,
좋은 점은 이제 한국에서도 내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터키에 갔을 때 느꼈다.
나라는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내가 지금 이 곳에 들고온 이 배낭 하나 정도라는 걸.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 또한
딱 이 7kg의 배낭만큼이다.
들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는 좀 무거워서,
외출 할 때는 잠시 내려놓지만,
멀리 이동할 때는 꼭 들고 다닌다.
내 삶도 마찬가지.
중요한 기억들, 무거운 짐들을,
매일 매일 들고 다닐 필요는 없다.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기고 살면 될 뿐.
배낭을 한 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바보는 없다.
들었다가,
내려놨다가,
들었다가,
내려놨다가,
하는 것이다.
.
.
내일이면 아르바이트가 끝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스트레스를 안 받고 한 아르바이트인 듯 하다.
8월에는 많은 약속이 잡혀있다.
내가 잡기도 했고,
잡히기도 했다.
그냥 만나고 싶다.
만나서 놀면 좋을 것 같다.
같이 여행 갔던 언니랑 영화도 보고
생일날에는 가장 친한 친구와 맛있는 걸 먹고
가족들과 휴가도 가고
오랜만에 풍물 공연도 하고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오빠와 밥도 먹고
내게 밥을 사고 싶다는 친구를 만나고.
학원에 가서 멋있는 선생님도 보고:)
그렇게 따뜻하게 8월을 지내다보면
이제 곧 개강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변호사님께도 안부 전화 드려야겠고
형사님, 상담사 선생님께도 안부를 여쭤야겠다.
친구 아버님 묘에도 꼭 가고,
주말엔 성폭력 생존자 언니들과 모임을 갖는다.
.
.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만나서 놀고 싶어하는 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데
떠나기는 뭔가 아쉽다.
그래도 일단 대학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좋은 경험 중 하나이니
이번 달까지 학원 열심히 다니고 공부해서
시험을 봐야겠다.
그리고 학교가 요구하는 점수를 만족하면
영국이든 터키든 원서를 써봐야지.
돼서 나쁠 것 없고
안 돼도 한국에 있는 것도 좋다.
.
.
아,
그리고 작은 결심 두 가지.
요즘 내가 얼마나 무딘 지 새삼 느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봐도 쉽게 지나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데
목발을 짚은 사람이 내 앞에 멈춰섰다.
나는 순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야, 혼자서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고 난 뒤
그 분이 마음에 걸려 다시 뒤를 돌아봤는데
다행히도 일행 분이 뒤따라 오셨다.
일행의 도움을 받아 그 분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다행이었지만, 역시나 그 분은 혼자 에스컬레이터에 타지 못 했다.
만약 일행이 없었다면?
곤란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한 마디 물어보는 것.
그게 내 작은 도전이다.
사실 그게 쉽지는 않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데 괜히 나서는 걸까,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사실 중학교 때 오르막길을 가시던 분의 휠체어를 내 맘대로 밀었다가
그 분이 신경질을 내면서 됐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런 종류의 경험 때문일까,
내가 도우려 하는 것이 혹여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많이 두렵다.
그래도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세요?'라고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고백하거나 소개팅 받기!
사실 뚜렷한 대상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슬슬 피하기만 했고,
혹시 했다가 차이면 굉장히 자존심 상할 것 같아서
아예 나서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차여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고
그리고 혹시 아는가? 차이지 않을 지?
아이러니하게도 차이지 않는 상황이 더 걱정되긴 하지만
(그럼 진짜 사귀어야 한다는 거니까)
그래도 누군가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고백해보거나 소개를 받아보고 싶다.
고백해보고 싶은 대상은
지금 학원에 있는 한 선생님?
멋있고 내 스타일이니 밥을 한 번 먹자고 해볼까나.
소개 받고 싶은 사람은 딱히 없는데
주변에 물어보면 있을 듯 하다.
어쩄든 누군가를 소개 받고 싶은 사람이야 많으니까.
내가 남자친구가 없다고 했을 때
소개를 받지 않겠느냐고 물어본 사람은 많았는데
그 때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었다.
이제 한 번 받아볼까, 싶다. 힣
.
.
그리고 가장 큰 목표!
이건 tv를 보다가 든 생각이다.
'마크'라는 호주인과 그 가족들이 tv에 나왔다.
한국인 아내와 예쁜 딸들 3명이었다.
그런데 마크씨는 정말 생각이 깊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아서
온 가족을 정말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고
더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나도 저런 남자를 남편으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힘들겠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되지.
그래서 나도 마크씨처럼,
누군가에게 정말 기쁨과 행복과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이 나로 인해 변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사람,
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할 줄 아는 사람-
이 되고 싶다.
얼마 전에
여행을 떠나는 친구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내주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좋아해서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요즘 여행 준비에 아르바이트에 너무 힘들었는데,
편지와 선물을 받으니 힐링이 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사실 이건 내가 그 친구가 그립기도 하고,
나는 특히 봉사활동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애착이 많아서
(내가 그 경험으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보낸 건데
그게 그렇게 큰 힘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도 말 한 마디,
편지 한 통으로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