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쉬는 날이었다.
낮동안 쉬면서 이것저것 하다가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집 근처에 아담한 산이 하나 있는데 아직 못 가봐서 그곳을 가보기로 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서 단조로워진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늘 향하던 지하철역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낯선 간판들을 지나고, 처음보는 놀이터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초면인 동네로 접어들었다.
산과 가까워질 수록 초록이 짙어지고
밤공기와 만나 자욱해진 흙냄새가 코를 한가득 채웠다.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따라 산으로 접어드는 계단을 올랐다.
함께 저녁 산책을 나온 가족을 보면서
나도 무시로 함께 산책을 나올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동네에는 아는 사람이 없고
룸메이트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늘 혼자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가니 잘 닦인 산책로를 걷는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해가 지기 전이라 바스락거리며 재잘대는 새소리도 들리고
꽃잎 다 떨구고 뿜어져 나온 잎새들도 햇살 받아 투명하고-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자니 마음이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인생 끝났다.
시간적으로 끝났다는 게 아니라
이 정도면 됐다. 는 마음이었다.
이렇게만 살 수 있으면 나는 충분하다.
함께 할 사람이 있고
몸 누일 방 한 칸이 있고
배 채울 양식이 있고
이따금 필요한 것을 살 돈이 있고
건강한 몸이 있고
돌아갈 직장이 있는데
걱정, 불안이 아무리 나를 찾아와도 다 무슨 소용일까?
다 그냥 지나가라지.
그런 마음으로 신이 절로나 팔을 흔들며 걸어가는데
안도현의 시가 나무에 음각이 되어 서 있었다.
'가난하다는 것'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은 내 가난이 생각나 한 달음에 달려가 읽은 시였는데,
가난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었다.
내 가슴의 빈 공간에 사랑을 채울 수도 있구나.
마침 나보다는 타인을 사랑해보자고 결심한 터였는데
빈 공간에 열심히 사랑을 채워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산길을 조금 더 걸어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들어왔던 곳과는 다른 쪽으로 걸어내려왔다.
초록초록했던 마을 길과는 달리
길쭉한 아파트들이 모여있는 아파트 단지 내로 난 길이었다.
꽤나 고급스러워보이는 아파트들이 즐비했고
방금 읽은 시가 생각났다.
가난하다는 것.
사실 아직도 이렇게 큰 집들을 보면 마냥 부럽다.
아파트에 살든 작은 집에 살든 상관 없지만,
그냥 저들은 마음이 여유롭지 않을까, 싶어서.
남의 삶은 잘 모르는 거지만.
잘 지은 아파트와 집들을 보며 생각했다.
인간은 충분히 이런 것들을 더 지을 능력이 있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할 여력이 있는데,
왜 그 능력을 쓰지 않을까?
도시도 가난한 도시가 있고 부자인 도시가 있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가진 자본력과 기술력 정도면
얼마든지 이 지구를 갈아엎어 모두 살기 좋게 만들 수도 있다.
그냥 안 하는 것이고
이미 충분히 살기 좋은 어딘가에 계속 집중되는 것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다.
답이 나오지 않는 불가사의를 안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다리와 무릎이 아파왔다.
30분만 걸으려 했는데 너무 오래 걸은 모양이었다.
길다면 길었던 한 시간의 마실을 마치고
시원하게 다리 스트레칭을 한 뒤 졸린 눈을 비비며 일기를 쓰는 중이다.
내일도 노동절이라 쉰다.
편안히 잠을 자고
내일부터 가난이 내게 준 빈 공간을
사랑으로 채워봐야겠다.
생각보다 좋은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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