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를 고소할 당시
무고죄가 두려웠을 때
증거가 부족해서 모두가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두려웠을 때
나를 버티게 해준 믿음이 있었다.
" 가장 강한 것은 진실이다."
이미 지나간 일에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아빠는 부인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뒤집어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내가 아니라 아빠 말을 믿으면 어떡하지.
교묘한 아빠가 이야기를 꾸며낼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멀쩡해서 사람들이 의심하면 어떡하지.
왜 나는 조금 더 망가지지 않았을까.
더욱 믿을만한 피해자가 되었어야 했는데.
이러한 걱정 너머로
나의 마음 속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단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일어났던 일은
일어났던 것이다.
진실은 태양과도 같아서
가리려고 해도 빛은 새어나온다.
그러니 나는 그냥 나로써 있으면 된다.
피해자인 척
불쌍한 척
울면서 무기력한 척 하지 않아도 된다.
엄마도 나를 도와주지 않지만
증거라곤 남아있지 않지만
나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
진실이 있다.
나의 무기는 이것이다.
누구도 감히 부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
.
.
그 진실의 힘으로 나는 재판 과정 내내 나로 남아있었고
사람들은 나를 믿어주었다.
.
.
그렇게 진실의 강력함을 알았던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그것을 잊고 살았다.
상담을 다시 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았던 것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진실을 외면하면서 살았는가, 였다.
진실한 내 마음
진실한 내 감정
진실한 관계.
모든 것을 제물로 삼아
나는 안전하다는 '착각'의 성을 쌓아올려 살고 있었다.
사람들을 보면 많이 웃었고
내 인생에 힘든 일이란 없었던 것처럼 씩씩하고 밝게 살았다.
누구도 증오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모두를 좋아하려 애썼고
일말의 공격성도 없는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라고는 하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내 안의 더럽고 추악한 것들은 모두 과거에 내려놓고
이제 내 안에는 맑고 깨끗한 것들만 남았다고
착각하면서 살았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사랑만을 듬뿍 받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
.
그러나 상담 선생님은 내 웃음을 받아주지 않으셨다.
내가 너무 많이 웃는다고 했다.
그렇게 웃으면
자기 자신을 못 느낀다고.
상대방도 어수선하다고.
그리고 모두는 알고 있을 거라고.
내가 그 웃음으로 무엇을 가리고 있는 지.
처음엔 모르더라도
결국엔 알게 될 것이라고.
.
.
나는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진실의 힘으로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뚫고 나왔으면서
어리석게도
스스로 진실을 가리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싫었으니까.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이
그를 떠올리게 했다.
분노
공격성
사랑
성욕
미움
욕망
이 모든 인간의 원초적인 활동들이
나는 너무도 싫었다.
그와 같은 것을 공유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없는 셈 치고 살았다.
그러나 진실은 힘차게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처음 알아차린 날은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하며 산 지난 날들이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내가 가려버린 진실의 빛은
쏘아져나가 다른 사람을 맞고 튕겨나왔고
반사된 그 빛을 보며 나는
그것이 그 사람의 것이라 생각했다.
새어나간 나의 미움이
상대의 몸을 맞고 나의 눈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
나는 그가 나를 미워한다며 무서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빛이고,
나의 미움이었다.
.
.
정확하게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야 그것이 나로부터 나아간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미워해야 사랑할 수 있다고.
미움을 느끼지 않고 미움을 표현하지 않으면
내 에너지를 모두 미움에게 잡아먹히고 만다고.
.
.
진실을 제물로 바쳐 안락함을 추구할 것인가
안락함을 제물로 바쳐 진실을 추구할 것인가.
이제는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고
진실을 되찾아보고자 한다.
진정한 나는 태양과도 같아서
가리려고 해도 새어나오기에.
이제는 새어나오는 빛으로써 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빛나보겠다.
빛을 뿜어내보겠다.
진실한 나의 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