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술을 마시면서 용기내어 말했다.
사실 차일피일 미루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힘들게 용기를 내었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치 않게 술을 마시러 갔고, 술의 힘을 빌려 말해야겠다고 번쩍 생각이 났다.
"아저씨, 제 고민이 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음... 그게 뭐냐면요."
한참을 망설였다. 기분이 나빠도 괜찮다고 하면서도 얼굴색이 변하는 사람이라는 걸, 표정이
한번에 변해버린다는 사람이란걸 알기에 한동안 머뭇거렸다. 그리고 술 한잔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나 사실 유학생이예요."
한숨이 나왔다. 그 다음은 어떻게 말을 이어갈까?
그냥 다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모조리 싹..
"여기 학교가 싫어서 작년에 8월에 유학갔어요. 북경대 가려구요. 원래는 편입 생각을 하고
갔는데 막상 가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북경대를 목표로 삼았죠.
사스때문에 이번 4월 21일에 나왔구요. 처음부터 아저씰 속일 생각은 아니였어요. "
일순간에 변해버리는 아저씨의 표정..
애써 티내지 않고 말하려는 아저씨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래, 내가 나쁜년이지.
"근데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건 다시 돌아가서 5년을 소비할까? 아니면 여기서 조용히 복학을
할까? 양갈래 길에 서 있어요. 어느쪽을 선택하든 후회는 하겠죠. 하지만 전 정말 중국어가
하고 싶거든요. 나중에 중국어쪽으로 나갈거구요. 근데 제가 왜 고민하고 있는 줄 아세요?
그건 집안형편이죠. 내가 중국에 있을 때 제일 편했던게 집안형편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져요.........................................................................................................................................................................................................."
정말 모든 얘기를 다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솔직해지고 싶었으니까. 솔직하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술을 급하게 마셨던 터라 많이 취해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실수하지는 않았다. 정신을 멀쩡했으니까.
손가락을 넣어 마음껏 구토를 한 다음에야 정신이 차려졌다.
겉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많이 찹찹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다시 만났다. 원래 약속을 했던 터라 할 수 없이 나갔다.
하지만 전처럼 재밌지가 않았다. 말을 많이 하던 아저씨도 도무지 말을 잘하지 않았고, 표정만
어두웠을뿐...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떠나질 않았다.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일찍 집에 들어왔다. '마지막'예상되었다. 아저씬 토요일에 만나자고
말하고 헤어졌지만 난 그게 진실이 아니란걸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 전화했을때도 받지
않았다. 여섯번이나 했는데....
아저씨는 농담조로 나에게 '결혼'이란 말을 쉽게 한다.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래왔다.
그럴 때마다 난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믿음이 가지 않았지. 여러가지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내가 그 아저씨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던 부분이 그런 말을 쉽게 한다는 점에서였다.
'결혼'.. 그래, 그 아저씨 나이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단어이다. 그렇지만 날 얼마나 봤다고,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쉽게 할까?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결혼'
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말 할 때마다 난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더 이상 그런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그 아저씬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미래가 없다고 해야되나?
현재? 그거 중요하지. 안정적인 현재도 중요하지만 난 미래가 보이는 사람이 좋다.
그렇지만 그 아저씨에게선 '미래'라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냥 현재 이 생활에 만족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그냥 이런 생활에 만족한단다. 난 싫은데.
아저씬 집배원이다. 그리고 고졸학력이고. 지금까지 해놓은 거라곤 하나도 없다. 공무원 시험 보고
떨어지고 20대를 그냥 이것저것 하면서 산 사람이다. 그리고 30살에 친구소개로 이 곳 우체국에
들어왔고.
방통대도 휴학상태인데 처음엔 내년에 들어갈 거라고 나한테 해놓고선 이제와서 생각중이란다.
시간이 없어서.. 시간? 그래, 그거 없다는 거 이해하지. 하지만 나중에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더군.
하고 싶지 않다고. 누굴 놀려?
그리고 처음엔 그랬다. 나중에 중국쪽으로 사업을 해볼 계획이라고.
매번 거짓말 좀 하지말라고 다그치면 자기는 거짓말이 한게 없단다. 그럼 허풍치지 말라고 하면
허풍도 안치는 거고 농담만 하는거란다.
그럴 때마다 어이가 없다.
술에 취해서 말했다. 선진국인 일본에 가서 알바 하며 공부하고 싶다고.
그랬더니 자기 누나도 일본에 유학갔었다고. 거기서 매형을 만났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 누나가 아니고 누나 친구란다.
매형이랑 만났다고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누나친구 남편한테도 매형이라고 한단다.
그러면서 '우리누나'라고 하지 않았고, '누나 친구'라고 했단다.
난 분명히 그렇게 듣지 않았는데.. 더 이상 따지고 들고 싶지 않아 말을 말아버렸다.
세상에 이런 인간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왜 나한테 작업 들어온거지? 설사, 내가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복학을 한다해도 더 이상 만남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처음 내 느낌이 맞아들어간다.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