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1월이네요.
작년 이 맘 때에는 마음이 부글부글 끊고 있었어요.
세상의 부조리를 증오하며 창자를 이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많이 평온해졌어요.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을 했거든요.
세상에는 여전히 부조리가 팽배하지만
일단은 나부터 살고 보자며,
오로지 나만을 파고 들었거든요.
내 상처
내 고름
내 마음부터 치료하자고.
조금은 이기적이 되어도 좋으니
아니, 이기적이 되어서라도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가장 처음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훗날 만나게 될 내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어요.
스스로 부모님을 욕하면서
나는 저런 부모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내가
그런 부모가 되지 않을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자,
고 마음을 먹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마음마저도 풀렸네요.
우리 부모님은 '그런 부모'가 아니었어요.
그냥
사람이었던 거예요.
물론 아빠는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요.
그 어떤 사정도 그 죄를 용서해줄 수는 없는
그런 죄를 나에게 지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이제는 용서했어요.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을 조금은 깨달았어요.
'용서는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예요.
억울해서, 나를 상처 입힌 사람에 의해 내가 상처 받고 아파하는 것이 억울해서
용서했어요.
물론 아직까지 응어리가 남았지요.
이것은 치료해나가야 할 일이예요.
혼자 해서 될 일은 아니지요.
잊기 전에 도움을 받아야 해요.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는 알고 있으니 괜찮아요.
그렇게 해서
내 안에 깊숙하고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증오가
어느 정도 흩어지고 나니
나의 마음이 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어
하나하나 어루만지기 시작했지요.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스스로가 못 생겼다고 생각했고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내가 찌질하고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사람들과 잘 친해질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어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갈망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배웠어요.
그리고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나는 소중해'가 아닌,
'소중하지 않아도 괜찮아.' 였어요.
모두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사람이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소중하지 않아도,
나는 나야.
나니까 소중한 거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주기를
내가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 소중한 사람이기를 바라고 바랐었거든요.
다른 사람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지 않으면
나는 정말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내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나는 나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예쁘다는 것도 깨달았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할 만큼 예쁘게 웃는다는 걸.
사람들은 나와 친해지고 싶어한다는 걸.
세상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는 걸.
언제나 세상은 나를 반갑게 웃으며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동안 내가 주변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건,
사람들이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나는 서서히 세상 사람과 마주하기 위해 몸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죠.
무서운 일이었고, 용기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조금씩
보이지 않을만큼 조금씩,
그렇게 몸을 돌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제 세상 사람들과 마주 보게 되었어요.
친구들을 만나면 웃는 얼굴로 먼저 밝게 인사해요.
그 전에는 먼저 나에게 인사 해주기 전까지는 내가 먼저 인사하지 않았어요.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인사하는 것을 싫어하면 어쩌나,
불안했었지만,
이제는 아니예요.
모르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게 되어도, 숨지 않고 피하지 않고
그 사람을 알아가려 노력해요.
그 전에는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기에는 내 스스로가 너무나 작아서
언제나 피하고 숨기만 했었지만,
이제는 아니예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지 먼저 생각해요.
그리고 그 일을 해요.
그 순간이 지나가면 가장 빛나던 순간밖에는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정신 없이, 순간에 충실하게.
그 전에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치와 표정을 살피며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 내 행동은 이 자리에 어떻게 비춰질까,
하는 걱정을 하며 전전긍긍했지만,
이제는 아니예요.
나는 이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어요.
뿌리가 없어서 조금만 센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리곤 했던 나는
이제는 이 땅에 스스로의 뿌리를 내리고 굳건하게 서 있어요.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고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일 거예요.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요.
가끔은 이런 일에 지친다는 거예요.
끊임 없이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여간 지치는 일이 아니예요.
가끔은 다시 껍질 속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해요.
말을 몰아치듯 자신을 다그치지 않고
힘들다 싶으면 잠시 쉬어가는 것.
제한 시간은 없으니까,
평가 따위도 없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힘들면 쉬어가기.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 정도예요.
첫 째는, 아직은 조금 부족한,
스스로의 삶 살기.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은 그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신경 써요.
때문에 나는 나의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해요.
밝은 모습이든 어두운 모습이든 나의 모습 자체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긴 하지요.
하지만 밝은 모습을 보였으니 이제 어두운 모습도 보여야 해요.
어두운 면도 나의 모습 중의 하나이니까요.
나는 밝기만 한 사람이 아니예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어두운 면을 보고 실망할까, 두려워 하지 않고
스스로의 어두운 면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욕도 하고, 친구도 때리고, 성질이 나면 성질도 내고.
내가 이렇게 못되게 굴면 나를 떠나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내려놓고 싶어요.
둘 째는,
사랑하기.
나는 아직 사랑하는 법을 몰라요.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두려워요.
왜냐하면, 나는 '싫증'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예요.
정말 정말 좋아했는데 나중에 마음이 식으면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
나는 그게 정말 정말 두려워요.
누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두렵고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두려워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상처주는 것도, 상처받는 것도 두려워요.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좋아지려고 하면 '싫어!'하며 밀어내곤 해요.
하지만 이제 그만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요.
스스로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면
나는 학교를 떠나
세상으로 훨훨 날아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