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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치노
 사람을 보낸다는 것   Diary
조회: 2854 , 2012-01-11 20:10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참 많이도 미워했다. 최근 몇년간..
최근 몇달간은 인사조차 하지 않았었다.
당신 몸이 아팠으니 힘든건 당연한건데 해도해도 너무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은 못지켰다해도
염하는 것도, 땅에 옮겨지는 모습도 어떻게 못 뵈었다.
당신이 안내켜 보여주질 않으셨나보다.

엄마가 암에 걸리셨을때도 건너건너 너도 나도 다 걸리는 암 막상 엄마에게 찾아오니
흔한 암이 아닌 내 삶을 흔드는 일이 되어 버렸고,
틈틈히 듣게 되는 부고도 나에게 일어난 일이 되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늘 그렇게 돌아가시는 일이 아닌
사람을 보내는 일이 이런 거구나 비로소 알게 되는 특별한 일이 되었다.

우리 자매가 유일한 친손녀이다 보니
아무래도 해야할 일이 많았다.
오시는 손님도 거의 부모님 손님이기에 식사 나르면서 인사 한번이라도 더 드려야했고
오실 때 가실 때 챙겨서 인사드리고,
친척분들 챙기는 것도 우리 일이었다.
아버지야 상주이고, 엄마도 잡일 하시게 할 수 없어 부지런히 움직였다.

많이 슬프진 않았다.
평생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하셨고,
늘 편찮으셨기에 본인에게도, 우리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엄마 아빠가 늘 식사를 방까지 날라야 했고,
근 1년간은 대소변도 못하셔서 화장실에 안아 옮겨야했고,
최근에는 그마저도 힘들어하셔서 기저귀에 요강, 아니, 그냥 실례하는 일도 여러번이라
시골에 내려가면 방문 열려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만큼 냄새가 났었다.

어려선 그래도 많이 따랐는데..
엄마 아빠가 바쁘셔서 늘 할머니 옆에 있었고,
흰머리 하나에 10원, 30원씩 받아가며 심부름 많이 시키는 할머니였지만 어김없는 우리 가족이었다.
그치만 엄마한텐 늘 악몽같은 시어머니였다.
별별 시원찮은 물건들이 없어졌다며 엄마를 도둑으로 몰았고,
고모들한테까지 연락해서 말도안되는 트집을 잡아 엄마를 힘들게 했다.
식사도 늘 짜네 맵네, 트집이었고,
여름에만 덥다고 문 열어놓는 정도까지도 주문해가시며 유난을 떠셨다.
요양소에 가신다 모시면 한달을 못버티고 나오셨고,
요양소에서도 대 단한 양반이라며 혀를 내둘만큼 보통이 아니셨다.
엄마 아빠는 늘 하신다고 하는데 끝끝내 한번을 인정을 안하시고
그 앙금들은 결국 가실때까지 풀지 않고 가셨다.

괴롭히지만 않으면 잘할 우리들이었는데 왜 공연히 억지를 부려 우리 맘을 떠나게 하시곤
그렇게 외롭게 힘들게 살다 가셨을까.. 오랜 정이 미운 정이 대부분인게 안타깝고도 원망스러워
엄마를 붙잡고, 엄마 너무 속상해.. 어떻게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어..하며
눈물지었더니 엄마도 같은 맘이었는지 나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 우리 할머니 불쌍도 했지.
일찍이 남편 보내고, 젊어서부터 병 얻어서 거동도 못하고
스스로 병신이라며 쓰디 쓴 삶이 당신이 제일 화나셨을꺼야.
우리 앞에선 스스롤 지키려고 더더더 악착스럽게 하시고,
지레 독해지셨는지도..

이모할머니가 오셔서 오열을 하셨다..
유일한 피붙이. 우리 할머니의 두살 아래 여동생.
당신도 여든다섯.
나이 드시고 편치 않은 몸에 서로 얼굴보려면 자식들 손을 빌려야 했기에
맘은 있었어도 찾아 보질 못했다고..
안그래도 어제 키큰 남자가 할머닐 데려가서 불안불안 했고,
자리 비운새 놓친 전화가 못내 마음 쓰였는데 그게 할머니 편찮으시단 전활 놓친거였다고..
빈소에 들어오지도 못하시고 안그래도 자그마한 몸을 구부려 우시기에
우리 할아버지가 할머니 데려가셨다고,
몸 편찮으신데 가신게 더 좋은 일이라고 달래드렸다.

예전엔 풍채가 있어 우리 할머니랑 닮은지 몰랐는데
병치레로 핼쑥해진 얼굴이 영락없이 우리 할머니 고대로다.
최근엔 오그라드셔서 달라지셨지만 곱디 고운 우리 할머니 예전 얼굴이 나타나 떠난 할머니 때문에 우시는 모습을 보니 영 마음이 먹먹해졌다.
같이 울고 있는 동생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중에 나중에 나이가 먹고 나면 내 동생과 나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겠구나.
언제 가는지 모르는 거니까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정신없는 2박 3일이 지나고 아빠가 할머니 방을 정리하자 하셔서 같이 들어가 정리했다.
왠 하얀 가방에서 예전에 내가 보낸 카드 한개가 나왔다.
그래..예전엔 크리스마스 때마다 할머니, 부모님 카드 이렇게 2개는 꼭 사서 보냈었다.
으레히..챙겼다. 꼭.
가족이니까 당연했다.
또 좋았다. 할머니가 좋아하셨으니까..
우리 생일날은 꼭 몇만원이라도 편지와 함께 주셨었다.
마음이 북받쳤다.
그렇게 좋은 날도 있었는데..좋게 좋게 보내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음을 달래고 다시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상자 하나를 여니,
카드들과 편지들이 수북히 담겨있다.
기억나는 편지지도 보인다.
할머니~~~
이렇게 보내드리면 안되는 건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눈물이 멈추질 않아 잠깐 나와서 눈물을 달랬다.
아빠도.. 검은콩 두유 5개밖에 못드시고 가셨다며..
물건들 못 쓰고 가신게 너무 많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사람을 보내는 일. 특히 가족을 보내는 일은 처음이라..
모든게 다 처음이었다.
인사하는 것도 몰라 손님 보고 안녕하세요 했다가 놀란 손님 얼굴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 싶어 급하게 핸드폰으로 검색해보곤 상중엔 안녕할 수 없으니 하면 안된다고 나와서 그 후론..목례와 고맙습니다 인사만 드렸다.
동생한테 알려주고..
할머니가 이뻐하던 막내가 상복 입은 걸 보니 그게 그렇게 슬펐다.
할머니 보여? 막내가 할머니 때문에 상복입었네.
할머니 가셔서 슬퍼서 입은 건데 보고 있어?
할머니가 보면 슬퍼하실 것도 같았고 또 좋아하실 것도 같았다.

집안 어른들이 다 오셨던 것 같다.
할머니가 맏며느리라서 그 밑에 할머니들이 다 오셨고,
형님 형님 하면서 우셨다.
또 자녀 분들 다 오게 하셔서 아빠 사촌인 삼촌들, 고모들까지 다 오셨다.
이런 건가 싶었다.
몸 불편하신 둘째, 셋째 할아버지가 그 몸으로 빈소 지키시는 모습이 숭고해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예를 지키나 싶었다.
또 빈소까지 근 70분이 따라오셔서 마지막은 맏며느리로 사신 우리 할머니 톡톡히 인사 받고 대접 받고 가시는 것 같아 흡족하기까지 했다.
어른들이 너네가 부모님한테 잘해야 한다며, 너희 아버지 효자였다고 너네가 잘하라고 너네가 잘해야되는 거라고 몇번을 말씀 또 말씀하셨다.

엄마한테 엄마는 오래 아프지만 마... 그러니까 자기는 할머니처럼은 안하겠다며 웃으신다.
정신없는 3일이었는데 잘 마쳐서 부모님 모두 기분 좋아보이셨고, 바빴던 동생도 나도 뿌듯하고 또 흐뭇했다. 큰일 치르는게 이런건가 싶었다.
3일동안 했던 생각들이 느꼈던 것들이 잊혀질까봐 안잊으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또 일기에도 최대한 남기려고 했다.
머릿속에 기억속에 몽땅 담아두고 싶다. 하나도 빠져나가지 않도록..
셋째할머니가 땅에 모신 할머니를 보시고는
아이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 좋으시겠네, 맏아들 아래 갖다놓고 이젠 큰며느리도 같이 아래에 데리고 있어 좋으시겠네 하시는 말씀이.. 위부터 아래로의 흐름, 묘 쓰는 거에 대한 의미까지 더해져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할아버지들, 할머니들도 연세들이 있으신데 경조사 귀찮아 하지 말고 챙겨드려야겠다.

할머니 미워해서 미안해.
그치만 그건 알겠어. 할머니한테 가는 마음이 크니까 더 미웠던 거.
그리고 할머니 아픈거 외로운거 헤아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중에 하늘에서 봐..

사랑아♡   12.01.12

좋은 곳에 가셨을거에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