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생긴 감정에,
나는 손댈 수 있다.
나는 질투와 비판을 구분할 수 있다.
'그 언니는 이게 문제야.'
라는 문장이 머리를 스치면,
'이건 질투다.'
라는 직감이 온다.
질투가 섞이지 않은 비판은
'이건 질투 이전의 비판이다.'
라는 직감이 온다.
나는 고쳐야 할 문제점과
그대로 둬도 좋을 나의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
나는 승부욕이 너무 강한 나의 성격이 가끔은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지만
그다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무언가를 하나 잘 하지 못하면
안달을 내는 것은 문제다.
그러니 고쳐야 한다.
,
,
하지만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원초적 감정들이 있다.
증오, 분노, 애증.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씩 고개를 쳐드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물이 고인 호수에서
물을 뺄 수 있는 방법은,
증발시키거나
넘치게 만드는 것 뿐.
그러나 물이 너무 많으면
쉽게 증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호수를 넘치게 하자니
어디로 넘치게 할 지도 알 수 없고
그게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줄 지도 알 수 없다.
결국 호수는 그대로 그렇게 고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물이 맑은 호수라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괜찮다.
그러나 '사해'라면.
아무것도 살 수 없고
넘치게 했다가는 주변을 병들게 만드는
사해라면,
그 호수는 위험하다.
넘치지 않은 호수는,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
엄마가 요즘 자꾸 아버지가 보고싶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자신은 자꾸만 보고싶은 모양이다.
매일매일 꿈에 나온다고 한다.
사랑했나, 보다, 엄마는, 아빠를.
그 말에 나는 끓어오르는 증오를 삼켜야 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의 딸을
성폭행한 남자가
그렇게도 좋단 말이지.
못 잊는단 말이지.
그래서 이혼하지도 않고
그렇게 같이 살았던 거지.
그동안 나는
끊임없이 같은 고통 속에 빠져 있었고.
당신은 알고 있었어.
아빠가 나에게 매일 그런다는 걸.
당신 눈 앞에서도 나를 만져댔어.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단 한 번도
'괜찮냐'
고 물어온 적이 없었어.
그저 감추려고만 했지.
묻어두려고만 했지.
나는 가끔은 당신이 정상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딸에게 괜찮냐고 묻기는 커녕
손잡고 병원 한 번 가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내색을 안 해서 그러니?
내가 아무 문제 없이 잘 크니까
내 마음은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다.
내가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미술도 잘 하고
매일 상을 타오고
집 한 번 안 나가고
한 번 비뚤어지지도 않고 자라니
괜찮아보였나 보구나.
조금만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면
내가 교실에서 한 마디도 안 하고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사람을 싫어하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당신의 그 어린 딸에게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도 알았을 텐데.
당신 딸이
학창시절 동안 남자친구 한 번 못 사귀는 걸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나봐.
내가 남자를 징그럽게 싫어한다는 걸 몰랐나봐, 당신은.
.
.
이런 온갖 생각들.
잘 구겨서 다시 뱃속으로 집어 넣는다.
-
분노
그리고 피해의식.
나는 그런 일을 당했어.
그리고 당신들을 위해 입을 다물고 살아왔어.
그런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다니.
이런 피해의식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같은 종류의 망상을 되풀이 하게 한다.
나를 극단의 상황으로 밀어넣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잘 버텨낸다.
예를 들어 실명이라든지
화상이라든지
교통 사고라든지.
그리고 사람들은 나에게 대단하다며
감탄과 존경을 보내준다.
나는 이것을 간절히 바라나보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도
그나마 이렇게 자란 것을
인정 받고 싶어서.
-
그리고 답답함.
나는
감히 말한다.
엄마는 무지하다.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코 앞만 보고 사는 엄마.
엄마는 아직 덜 자랐다.
이런 답답함들.
그리고 반드시 수반되는
이런 생각들에 대한 죄책감.
.
,
원초적 감정들.
분노,
피해의식은
연결 되어 있다.
해결 방법은 알겠는데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답답함.
이것 또한 어느 정도
해결 방법이 눈에 보이긴 한다.
분노와 피해의식을 해결하고
편한 마음으로 엄마와 터놓고 대화 한 번 해보고 싶다.
.
.
뭐
가장 시급한 건
제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이 생각을 바꾸는 거겠지.
이거 먼저 하고, 이 다음이야.
내가 엄마에게 화를 내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들춰내고
엄마와 나 사이는 나빠지고 말 거야,
뭐 이렇게 생각하는.
-
아무튼
오늘의 사족은 여기서 끝.
엉덩이가 뜨거우니까.
울다 여러분
굿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