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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일 가기 싫다.   trois.
조회: 2794 , 2013-01-16 10:55



정말 정말 정말 저엉말 
약국에 나가기 싫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 듣기 싫은 수업 들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그 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 때는 성폭행과 관련된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만큼 수업이 듣기 싫어서
자꾸만 빠졌던 기억이 난다.
도무지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수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국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이런 저런 일들이 힘들어
약국에서 일 하는게 힘든 것도 맞지만
아마 나는 
'하기 싫은' 
일이어서 약국 일을 이다지도 싫어하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을 다 성폭행 탓으로 돌려버리는 사고구조 탓에
그걸 깨닫지 못했었던 것은 아닐까? 



.
.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에는
극도의 우울함에 시달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는데,
그 때 당시에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감이 굉장히 컸었다.
내가 왜 이런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
이것은 제대로된 공부가 아니다.
우리 나라 교육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며 날마다 힘들어 했었다.
수업 하나를 들어도
나 같으면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
저건 진짜 교육이 아니야.
선생님만 다 말하고 학생들은 그저 주워 듣고 쓰기만 하는게
무슨 공부야.
다 죽은 공부잖아,
라며 
괴로워했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
대부분의 수업은 즐거웠지만
교양 수업 중 
학점 때우기 용 교양은 정말로 싫었다.
특히 자연 과목이 싫었는데
그 수업은 나에게 하등 의미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기도 했지만
교수의 수업의 질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괴로워하며 수업을 듣곤 하다가
결국 나머지 수업은 모두 뺴버렸다.



.
.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말 정말 괴로워하면서 한다.
약국 일도 하기 싫다.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고
하루 종일 같은 일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이렇듯
하기 싫은 일은 못 하는 것,
한 번 우울해지면 그 늪에 깊이 빠지는 것이
어린 시절의 영향일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
내가 약국을 나가기 싫은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내가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힘이 들고
힘이 드니까 다른 온갖 힘든 것들이 다 딸려나오는 것이다.

그동안은 뒤집어 생각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답이 나오지 않았다.



.
.


오늘은 오후 출근이다.
조금 있으면 씻고 약국에 간다.

지금 당장이라도 약국에 나가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된다면 약국 사람들은 아주아주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 사람이 부족해서 내 일을 대신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유로 그만두더라도
다음 달에 그만둘 것이다.
아빠에게 등록금을 대달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와서 잘 되더라도 나는 한 달 뒤에야 그만 둘 것이고
답장이 안 와서 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로 복학하게 되더라도
나는 한 달 두에 그만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나는 어찌되든 한 달은 근무를 할 예정이다.
그러면 그 한 달 동안 내가 이렇게 괴롭지 않고 편안하게 
약국 근무를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

일단 나는 약국 일이 싫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눴던 약사님 한 분과 이야기를 했듯이
나에게는 지금 약국 일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의미도 없고 관심도 없고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약국에서 일한 덕분에
학자금 대출을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복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약국에서 일할 수 없었다면 나는 이만큼 돈을 벌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복학을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나를 고용해주신 국장님
나와 함께 해준 약국 사람들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감사한 곳이다,
이 약국은.

내가 지금 어딜 가서 이 조건에 140만 원을 벌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어딜 가서 이렇게 실수를 하면서 일을 다닐 수 있을까? 
없다.

나는 약국 때문에 힘든 것보다
고마운 것이 더 많다.

일도 잘 하지 못하는 나에게 140만 원을 월급으로 주시는 국장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제라도 정말 정말 일을 열심히 해서 보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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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국 일이 힘든 것 중 하나는 내가 자꾸만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실수를 하면 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기고
그 트러블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제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자.
그러면 훨씬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근무를 할 수 있을 거야.
오늘의 목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실수를 하지 않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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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도 하지 않고
검수도 다 끝내고
입력 실수도 하지 않고
주문할 거 다 주문하고
까먹지 말고 챙길 거 다 챙기고
입고 잡을 거 다 잡고.

별로 대단치도 않은 것들인데
이런 거 못해서 스트레스 받지 말고 트러블 만들지 말고.
잘 하면 다 내가 편한 거니까.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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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하루만큼은
온전히 나의 편이 되어주자.
최대한 실수를 안 하려고 노력하겠지만
만약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나의 편이다.
나는 오로지 나의 편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에게 등을 돌려도
나는 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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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씻으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