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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생각할 시간   trois.
조회: 2335 , 2013-01-23 00:07



오빠와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 계속 연락만 해봤자
더이상 좋아질 것이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너무 혼란스럽다.
도대체 왜 오빠가 이렇게 불편한 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 사이가 삐그덕 거리는 건
내가 오빠를 불편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오빠가 불편하다.
뭔가 내 얘기를 터놓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오빠에게 아주아주 바라는 게 많고
서운한 것도 많다.
그리고 그런 나에 대한 고민 때문에
오빠와 함께 있는 것은 내게 스트레스이다.


.
.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도 편하고 
같이 있기도 편한데
오빠랑은 유독 불편하다.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도 가리게 되고 
나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다.

그리고 오빠의 사소한 행동에도 나는 기분이 아주 나빠지고 만다.


.
.

자주 보지 못하고
카톡이나 전화만 하는 것도 내게는 참 힘들다.
친밀감이 전혀 쌓이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나는 아무래도 성격상 
자주 부대낄 수 있는 사람과 사귀는 수밖엔 없는 것 같다.

.
.

맞아, 
자주 만날 수만 있었어도 참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 같다.
조금만 더 서로 가까이 살았어도. 
그러면 서운하거나 불편한 것이 있을 때
만나서 얼굴을 보면서 풀 수 있었을텐데.
지금처럼 마구마구 쌓여있지 않았을텐데.



.
.



그리고 나는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않고
학교와는 멀리 떨어진 우리 집에 있는데다가
평일엔 하루 종일 일을 해야되고
토요일에는 상담
일요일에는 오빠를 만나야 해서
사실상 친구들을 거의 못 만나고 있는 실정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감정의 해소가 모두 오빠를 통해 되다보니
감정의 흐름이 오빠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내 스스로가 그것을 제어하려하다 보니
그것도 힘들고
가끔 제어가 안 될 때면
서로가 힘들어진다.

'서운함'의 감정이 가장 크다.




왜 나 힘든 거 몰라주니
말 좀 그렇게 안 하면 안 되니
한 번이라도 나 일하는 데 앞에서 기다려주면 안 되니
조금만 더 날 보고 싶어 해 줄 수는 없겠니
약속 좀 안 깨면 안 되겠니
조금만 더 자상해질 순 없니
콘돔 좀 끼면 안 되겠니
그만 좀 놀리면 안 되겠니
위로 좀 해줄래
울 땐 울지 말라고 하지 말고 울어도 된다고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조금만 더 날 혼자 둬 줄 수는 없겠니
내 사진 좀 핸드폰에 가지고 다니면 안 되니
네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 사진들 틈에 나는 없니 
내 이름 뒤에 하트 하나만 붙여주면 안 되겠니
폰 배경으로 내 사진 카톡 프로필에 내 사진 좀 넣어주면 안 되겠니
나랑 통화할 때 딴 짓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나랑 있을 때 카톡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나랑 카페에 있을 때 뉴스 좀 안 보면 안 되겠니
나랑 애기할 때 농구 좀 안 보면 안 되겠니
기념일에 선물 교환 좀 하면 안 되겠니
빈말이라도 이쁘다고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징징대면 뭐라고 하지 말고 좀 다독여주면 안 되겠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아니라고 자르지 좀 말고 그냥 공감 좀 해주면 안 되겠니
내가 누굴 욕하더라도 내 편이 되어주면 안 되겠니
내가 좋아하는 건 같이 좋아해줄 수 없겠니
늘 처음 같을 순 없겠니
늘 처음처럼 나한테 쩔쩔매줄 순 없겠니
먼저 연락하고 내가 연락 안 하면 어쩔 줄 모르는 그 모습 그대로이면 안 되겠니
언제나 나한테 잘해주면 안 되겠니
버스 정류장에 같이 서 있을 땐 날 좀 안아주면 안 되겠니
나 좀 그만 들여보내려고 하면 안 되겠니
오르가슴은 너만 느끼지 말고 나도 좀 느끼게 해주면 안 되겠니
섹스는 너만 사정하고 끝내지 말고 나도 즐기게 좀 더 해주면 안 되겠니
불안해 죽겠으니 네가 콘돔 좀 끼면 안 되겠니
내가 처음이라서 불안해할 때 옆에 있어주면 안 되겠니
제발 부탁인데 약속 좀 지키면 안되겠니
못 지켰으면 좀 달래주면 안 되겠니 
내가 사후 피임약 먹었을 때 우리 집 앞으로 날 보러 와줄 순 없었니
첫 경험 때 사후 피임약 먹고 두 번째 섹스할 때 콘돔을 가져와 줄 순 없었니
콘돔이 없었으면 네가 좀 안 해줄 순 없었니
그리고 내가 불안해 임신 테스트를 할 때 조금만 더 관심 가져줄 순 없었니
내 생리 주기가 어떻게 되는 지 관심 좀 가져줄 순 없었니
내가 너를 못 믿어 여행 가기 전에 경구 피임약 먹은 건 알고 있니
그리고 그 모든 피임 도구들의 포장지들을 내가 못 버리고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니
사후 피임약 포장지, 임신 테스트기가 아직 내 가방에 들어 있는 거 알고 있니
내가 힘들다고 하면 무조건 공감해주면 안 되겠니
제발 부탁인데 힘내라고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우는 사람한테 울면 약해지니까 울지 말라고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속으론 이해를 못 해도 좋으니 겉으로만이라도 그래그래, 해주면 안 되겠니
때로는 가족보다는 아니더라도 가족만큼이라도 나를 좀 생각해주면 안 되겠니
내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주면 안 되겠니
보고 싶은데 못 봐서 너무너무 아쉽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안 되겠니
네가 오빠니까 서운한 거 없냐고 먼저 좀 물어봐주면 안 되겠니
내가 하는 얘기가 아무리 바보같더라도 나무라지좀 말아줄래





우와
적어놓고 나서 나도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그래, 
복잡할 거 없다.
이런 저런 사소한 서운함들이 쌓여서
오빠에 대한 내 감정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와서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할 지 나는 모르겠다.
그냥 헤어지고 나서 날려버리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이 서운한 감정들을 해소하고 극복할 만큼 
서로에 대해서 우리가 감정이 남아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냥 
첫 연애를 통해 깨달은 건,
서운한 건 그 때 그 때 말하는 게 좋다는 것.





.
.


사실 해외 봉사 자유 여행 기간에 사귀게 되고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는
아주아주 좋았다.

나도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고.

언제부터 삐걱거렸나,
를 떠올려보면

사귄 지 2주째 되던 날 
첫 경험 날이 첫 번째 위기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오빠의 잦은 약속 깨기가 시작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의 아르바이트와
심리 치료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
.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리고 나는 이미 서운함과 상처가 쌓일 데로 쌓여 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내가 행할 성폭행에 대한 직면 과정을 
이 남자와 함께 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단순히 나와 맞지 않는다며 인연을 내팽개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할 만큼 노력하고
성장할 수 있는 만큼 성장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섣불리 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판단이 섰다.
오빠와 나는 인연이 아닌 것 같다.
특히 나는 오빠와 있을 때 나 자신일 수가 없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 자신일 수가 없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있을 수가 있을까.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성폭행에 대해 나 자신과 대화를 어느 정도 한 다음에야
나는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사랑이 힘이 든다.
모든 관심이 나에게 맞춰져 있어서 주변 사람들, 특히 곁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쓸 수가 없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이상적이겠지만
적어도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빠는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하며
설령 내가 말해준다면 이해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만큼 오빠가 편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여러모로 오빠는 지금 내게 버거운 사람이다.
나도 오빠에게 버거운 사람이다.
서로에게 떨어져 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




.
.


나는 아주 적어도
아빠와의 직면 과정이 지난 후에야 
누군가를 곁에 두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를 직면하기 전에는
그동안의 모든 감정들이 내 안에 쌓여서
분출구를 찾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찾은 분출구는 
바로
내 남자친구이다.



번짓수가 틀렸다.
그러나 한 번 터진 감정을 회수할 수가 없다.
오빠에게로 끊임없이 흘러든다.
괴롭다.
오빠도 지친다.


적어도 이 감정 처리가 어느 정도 된 다음에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성폭행과 관련해서
나 자신과 대화를 해본 다음에야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결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내 안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나를 정말로 미치게 만든다.


아주 돌아버릴 지경인 것이다.
목숨이 꺼졌으면 싶을 정도로 괴로운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상대는 알아듣질 못한다.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
실제로 괴로운 정도와 내가 갖다 붙이는 설명들이 연결이 되질 않으니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고 
나는 그 진짜 이유를 설명을 안 해주니까.
물론 설명을 하고 싶은데 못 해주는 거지만.

그러니까 내가 돌아버리겠다는 것이다.



나 힘든 것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뭐가 힘든 지는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

그래서 한동안은 누군가를 옆에 두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연습을 해야겠다.





가장 먼저
나 자신과 대화해봐야겠다.




.
.



어쨌든 결론은 났다.
오빠와는 여기까지만 만나기로.
서로 더 지치고 감정 상하기 전에
그냥 전처럼 친했던 오빠 동생 사이로 돌아가기로.

그래서 가끔씩 만나면 인사도 하고 안부도 묻고
그렇게 되돌아가기로.

그리고 나는 또 내 인생을 살아가야겠지.
아직은 과제가 많으니까.



하,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