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의 틈바구니에
끼여있는 느낌이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못하고
어딘가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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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생물[生物]은 이렇게 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드넓은 들판의 삶에서
무리에 소속되지 않은 개체란,
이제 곧 죽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드시
어느 쪽에든 속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불편하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여서 불안하며
소속감을 느끼도록 노력해야 하므로
괴롭다.
그러나
괜찮다.
소속되지 않아도
나는 죽지 않는다.
하나야,
하나의 생명[生命]아
이 곳은 들판이 아니야.
다행인지 아닌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이고,
이 곳은 사회[社會]란다.
홀로라도
살 수 있어.
그러니 그런 종류의 근원적인 불안과 위협은
조금 느슨하게 풀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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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일까.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일까.
어느 편으로는 똑같은 사람인데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보면 결코 같지 않다.
내 지난 날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사람에게
툭,
던질 수 없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로 느끼게끔 한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아온 것인가,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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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나는 그냥 나에게 주어진 일상을, 시간을, 삶을
감당하며 지내왔을 뿐인데.
그냥 이것이 나인데
어쨰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이야기하기가
이다지도 힘이 들며
행여라도 누가 알까 쉬쉬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이 삶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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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
22살,
엄마와 아빠 사이에 태어나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어찌어찌 살았고
기억이 날 무렵에 이미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고 있었다.
7살 때 나는 남자의 성기를 잡았고
나의 작은 손은 하얀색 액체로 범벅이 되었다.
7살 때 나는 남자의 혀가 내 그곳을 핥는 것을 느꼈다.
10살 무렵엔 이미 섹스를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이 그 날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내 안에 사정을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배 위에 사정을 하기도 했다.
언제나
신음 소리를 내며 내 이름을 불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침대에 눕혀져 아버지의 혀틀 느껴야 했고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서도
이불 속에서 내 그곳을 만지는 아버지의 손길을 느껴야했다.
12살 때는
수요일에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어
어머니가 집에 돌아온 다음에야 집에 들어갔다가
밤에 퇴근한 아버지에게
성적표를 가지고 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수학을 86점을 맞았다는 이유로 손바닥 10대를 맞아야 했는데
그따위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가
밟혔다.
14살 때는
아버지에 의해 발가벗겨서 그가 원하는 자세로 사진을 찍어야했다.
방학이 돌아오면 매일 밤이 아닌 매일 아침에 섹스를 해야했다.
15살 무렵에는 나를 안고 자야겠다는 아버지의 고집에
엄마와 아빠 사이에 누워 나의 가슴을 만지는 아버지의 손을 느껴야했다.
엄마가 이 상황에 신경질을 내자,
아버지는 내 가슴이 드러나도록 내 윗옷을 걷고 그곳이 드러나도록 바지 역시 내린 뒤에
'이게 뭐라고 그렇게 지랄이냐'
고 소리를 질렀다.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방에 있던 나를 불러내서
쇼파에 누워 안고 있곤 했다.
그리고는 내 가슴을 만졌는데,
엄마가 뭐하는 짓이냐고 물으면
'네가 이해해라'고 말하곤 했다.
16살 쯤인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술 취해 요구하는 아버지에게
'싫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화장실로 끌려 들어가
'죽어, 죽어'
소리를 들으며 맞아야 했다.
쓰레기통이 내 머리에 내리 꽂혔고,
산산조각이 났다.
16살 때 친구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친구는 당장 엄마에게 이야기하라고 했고, 나는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이야기했다.
아빠의 첫마디는
'씨발 기껏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왔더니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였고
첫 행동은
나에게 물주전자를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그 뒤로 엄마 아빠는 1년 동안 싸웠다.
그렇게 싸우다 엄마가 집을 나가면 아빠는 나를 끌고 엄마를 찾으러 다니며
'그러게 왜 말해서 이 사단을 만드냐'고
'너도 좋아하지 않았냐'고 했다.
나는 그 뒤로 엄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해서 엄마와 동생이 나 때문에 굶어죽게 될까봐
무서웠다.
나 때문에 엄마가 남편을 잃고 동생이 아빠를 잃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미안했다.
나만 참으면 되는데
나까짓것만 참으면 되는데
내가 뭐라고
나만 참으면 이 집안이 조용한데.
나만 불행하면.
이 모든 것들을 잊기 위해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했다.
눈을 뜨면 공부 했고 공부를 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살아내다가
20살이 되어 대학 면접을 보는 날,
면접을 잘 보았냐며 전화를 건 아버지에게
'한 번만 해주면 안 되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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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엄마와 아빠는 드디어 이혼을 했고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온갖 상처들을 끌어안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