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 시간 고민해오던 것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왜 나는 여러 사람들과 두루 친해지지 못하는 걸까,
처음 만나는 사람과 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면서 언제나 친구가 많은 사람을 부러워했다.
나도 저렇게 아는 사람이 많았으면, 하고.
단순히 인맥이 넓다는, 그것이 부러웠던 것은 아니다.
친구가 많으면 그만큼 세상이 넓어진다는 이야기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사람과 함께 찾아온다.'
맞는 얘기다.
어차피 '우주는 이마부터 뒷통수까지'다.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느냐, 얼마나 많은 간접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우주의 넓이가 달라진다.
나는 그것이 부러웠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항상 소수의 사람들과만 친했다.
많은 사람들과 두루 친해질 수가 없었다.
더욱 아쉬운 것은,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그 사람들을
전부 다 내친다는 것이다.
나에게 먼저 다가온 친구들을 받아주기만 했어도 친구가 아주 많을텐데,
라는 생각에 자주 내 성격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나의 친구 사귀는 방식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잘 해준다.
잘해주고 싶은 사람한테는.
그런데 친구가 많아지면 모두에게 그렇게 잘 해줄 수 없다.
그러면 잘해 줄 수 있는 친구, 잘 해줄 수 없는 친구가 나뉘게 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느낀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평등'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아버지를 싫어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잘해주기가 싫었다.
말 한마디 살갑게 해주는 것도 싫었고, 안마는 커녕 만지기도 싫었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해주고 싶었다. 잘해주고 싶었는데,
아버지에게는 무뚝뚝하면서 어머니에게만 잘해주면,
아무리 싫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비참함을 느낄 것 같아서,
그래서 덩달아 어머니에게도 잘해주지 못했다.
편지를 쓰고 싶은데,
어머니한테만 쓰고 아버지한테는 안 쓰면 아버지가 비참해할까봐서
결국 어머니한테도 쓰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가 씁쓸함, 비참함을 느끼는 것이 싫다.
누구에게든 잘해주고 싶고, 어느 한 사람에게 신경을 못 쓰게 될 만큼
많은 사람을 아는 것이 싫다.
내 사람이 된 이상, 내 친구가 된 이상 정말 정말 잘 해주고 싶다.
잘 해주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친구가 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도 소수의 친구만 사귀나보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유보다도 이게 더 큰 이유인 것 같다.
-
생각해보면 이게 그렇게 나쁜 방식은 아니다.
그냥 앞으로도 이렇게 쭉 살아야겠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고치고 싶다.
편식.
나는 편식이 심하다.
음식을 굉장히 가린다.
조금이라도 입에 맞지 않으면, 입에 대지도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면 아예 친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내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런 편식이 인간관계의 편중을 가져오는 듯 하다.
소수의 사람들과 깊이 친해지되
그 깊이 친해질 사람을 만들 때
조금 더 많은 후보들을 만들자.
한 번 살갑게 인사하고 얘기하는 것만으로 그 친구와 꼭 깊이 친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챙겨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잠깐의 탐색전.
그것만큼은 두려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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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르겠다.
복잡하다.
정리하자.
나의 인간관계에는 대략 네 가지 정도의 문제가 얽혀있다.
첫 째, 자신감부족.
둘 째, 사람에 대한 신뢰부족.
셋 째, 편식
넷 째, 평등에 대한 강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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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모두 성장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이번 여름 방학의 목표는
이 네 가지의 근원에 대하여 탐색하고 사람을 대하는 과정에서 고쳐보는 것.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My str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