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변인이 출산했다는 소식에
산부인과를 다녀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 출산하는 사람도 많고, 결혼소식을 알리는 지인들도 많다.
역아여서 제왕절개를 했다고,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며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맞이한 그녀는
엄마의 얼굴을 한 채 누워있었다.
남편은 분주하게 입원수속을 하고, 마실 것을 내주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 고생많으셨죠.. 라고 말을 꺼내는 내가 어색하다.
고생은 무슨. 마취해서 아무느낌도 없는데, 이제 곧 마취풀리면 그때부터 고생이지 뭐.
산부인과 입원실이라 그런지 후끈하다.
산후조리를 잘 해야한다는 한국인의 풍습때문인건지,
온 창문을 꽁꽁 여닫아놓은채, 보일러 온도를 엄청 높게 틀어놓고 있었다.
물을 마시고 마셔도 갈증은 수그러들지 않고,
곧 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신생아 면회시간은 아직 멀었다며, 태어나자마자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여준다.
새빨갛다.
눈을 꼭 감은채로 울음을 터트린건지, 입을 벌리고 있다.
그냥 새빨갛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예쁘지? 라고 묻는 그녀에게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산부인과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버스를 탔다.
40분가량 타고 가면, 엄마 가게가 나온다.
전화도 없이 불쑥 엄마 가게로 들어섰다.
어머, 진아 왠일이야- 하며 어김없이 웃으며 반겨주는 엄마가 있다.
그냥, 할 일도 없고 날도 좋고, 보고싶어서..
가게에서 잠시 앉아 놀다가 엄마와 함께 본가로 향한다.
요즘 니 아빠가... 호호호, 그랬지 뭐니~
권이가 요즘 공부를 되게 열심히 해~
날씨가 내일부터 추워진다는데 엄마 입을 옷이 없다야~
넌 꼬라지가 왜그러냐, 어디 아퍼?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재잘거리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며
음반가게에서 사온 7080 가요베스트를 꺼내준다.
역시 내딸이야, 고마워, 딸~
애교넘치는 목소리로 엄마는 여유롭게 CD를 듣는다.
소녀같고 사랑스러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두부조림과 김치찌개, 계란말이를 해서
저녁상에 올린다.
아빠도 왠일이냐며 같이 식사를 한다.
오랜만에 비워놓았던 내 방 침대에서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 3시.
늘 비슷한 시간대에 깨어난다.
꿈을, 1년에 한두번 꾸면 많이 꾸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요즘은 매일매일 꿈을 꾼다.
꿈을 꾼건 기억이 나는데, 무슨 꿈인지 생각나지 않는게 더 많지만.
간밤에, 꿈속에서-
내가 꽃을 준 그이가 있다.
언제고- 손으로 쓰던 일기장에, 꽃 한송이 사주세요, 나에게 보내는 낭만. 이라는 글을 쓴 적 있는데
갑자기 그 새벽에 그 문구가 떠올랐다.
낭만, 이라...
웃기게도-
그이가 건내준 꽃은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프리지아.
내 취향을 모르는군... 훗.
또 한번 꿈 속에 찾아와, 내게 꽃을 줄 요량이라면- 내 취향을 알아서 오도록,
얼굴 모를, 이름 모를 양반아.
피곤한 얼굴로 일어났더니 엄마가 잠을 못 잤냐고 성화다.
아니, 잘 잤는데- 라며 대꾸한다.
아빠는 약국으로, 엄마는 가게로, 동생은 학교로.
나는 빈둥빈둥 티비를 보다, 엄마가 깔끔하게 치우고 정리해놓은 주방을 서성인다.
냉장고도 열어봤다가, 싱크대도 열어봤다가..
차곡차곡 정리되어있는 그릇들과 냄비, 식료품들. 찬합들.
잃어버렸던 열쇠를 찾았다.
본가 문을 잠그고 나섰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우산을 쓰지 않고 그냥 걷는다.
걷다가 걷다가보니 기차역이다.
버스를 타면 본가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는 한시간 반. 거기다 두번 환승까지 해야한다.
기차를 타면, 한시간 반 거리가 15분으로 줄어든다. 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10분을 더 가면 된다.
망설임없이 기차를 탔다.
역시 내리고 싶지 않다. 이대로- 부산이든 서울이든, 가버리고 싶다.
비도 오고, 우산도 없고.
그냥 후드셔츠에 달린 모자 쓰고, 따뜻한 커피 하나 들고 이리저리
헤매고 싶은 하루.
아무나 내게 꽃을 건내준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꽃을 받아들고, 그 내민 손을 잡고 웃어주리라.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며.
제발, 이 양반아, 내가 좋아하는 꽃을 달라고...